‘문재인 대세론’ 한 마디로 대선 구도를 설명할 수 있는 시기는 이제 지나갔다. 각 당의 후보가 사실상 확정된 이후 여론조사 결과가 일관되게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의 지지율 상승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JTBC 의뢰로 한국리서치가 4일 하루 동안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1천명에게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홍준표 경남도지사,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심상정 정의당 대표 중 이번 대선에서 지지하는 후보를 물어본 결과, 문재인 전 대표는 전체 응답자의 39.1%, 안철수 전 대표는 31.8%를 얻는 걸로 나타났다. 3위인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8.6%였다(유선 18.2% 무선 81.8% 전화면접, 유무선전화 RDD 무작위 추출, 지역별 성별 연령별 가중치 부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1%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 수치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여전히 1위는 문재인 전 대표가 고수하고 있지만 2위와 3위 간 격차가 20% 이상 벌어졌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보수후보로 분류되는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을 합친 수치는 전체의 13% 정도다. 통상적인 선거에서 드러나는 보수적 유권자의 표심이 40~45% 정도에 이른다는 걸 감안하면 전체 유권자 중 보수적 지향을 가진 30%의 유권자가 안철수 전 대표 쪽으로 이동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보수진영 내에서의 안철수 쏠림 현상이 있다는 것이고, 2위와 3위의 격차가 큰 만큼 앞으로 이는 좀 더 가속화될 가능성마저 있다. 이런 상황이니 양자대결을 전제하는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전 대표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5일 JTBC 뉴스룸 방송 화면 캡처

물론 여전히 실제 선거에서 양자구도가 성립될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지사와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라는 선택지가 사라지거나 사실상 무력화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여론조사에서 보수적 유권자들이 안철수 전 대표를 지지한다는 응답을 했더라도 실제 투표장에 나올 것인지는 다른 문제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반대로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비토 여론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양자구도 형성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다는 진단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대선 구도는 진보 대 보수가 아니라 1등 대 2등이 될 거라는 거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선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문재인 전 대표 입장에선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경선 상대였던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 지지층을 끌어안고 중도확장에 나서겠다는 건 그래서다. 후보 수락 연설에서 “안희정 동지, 이재명 동지”를 말했고, 경선 과정에서 문제가 된 ‘문자폭탄’, ‘18원 후원금’ 등에 대해서는 비록 ‘양념’ 발언으로 또 구설에 오르긴 했으나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를 통해 사과했다. 거기에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로 당선된 때와는 달리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한 전 대통령의 묘역을 모두 참배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미봉적 행보로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는 미심쩍다. 이미 문재인 전 대표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누구나 아는 상황에서 그에 맞는 행보를 보여주는 일종의 ‘산수’로는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너무 우클릭을 했다거나 반대로 좌클릭을 했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전 대표가 한국 사회를 유의미하게 바꾸기 위한 어떤 핵심적 비전을 갖고 있는지를 정확히 내보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안철수 전 대표를 보수 세력의 대표주자로 활용하고 싶어 하는 일부 세력들은 연정 협치 등의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곧 출마 선언을 할 걸로 예상되는 김종인 전 의원의 경우는 ‘통합정부’를 내세운다고 한다. 미증유의 위기를 목전에 둔 상태에서 정파적 대결구도를 뛰어넘는 초당적 협치를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국민의당과 안철수 전 대표의 경우 자유한국당 등 보수세력과의 연정 또는 연대를 공식적으로 언급하면 지지층이 붕괴할 위험을 안고 있다. 특히 이에 관한 호남에서의 여론 추이를 민감하게 따질 수밖에 없다. 정치공학에 예민한 박지원 대표가 ‘3단계 연정론’을 말하면서 “멜팅팟이 아니라 샐러드볼 연정”을 말하는 건 그래서다. 연정이나 연대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이를 이루는 방식은 전형적인 세력 간 통합이 되도록 하지 않고, 일단 자력으로 정권을 잡은 뒤 연정을 시도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는 문재인 전 대표를 협소한 자기 지지층만을 바라보는 폐쇄적 정치관의 소유자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실제 반대편에 서있는 세력은 하나같이 ‘친문패권주의’니 하는 수사를 언급하며 문재인 전 대표의 폐쇄성을 공격하고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가 4일 오후 대전 한밭체육관에서 열린 완전국민경선 19대 대선 후보자 선출대회에서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며 두 팔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전 대표는 이런 식의 공격에 대해 지금까지 “문재인을 두려워 한다”거나 “적폐세력과 연대하려는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대응해왔다. 문재인 전 대표가 말하는 ‘적폐청산’은 물론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무엇을 반대하고 무엇을 없애겠다는 것만으로 정권을 달라고 말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안이함이다.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하는데, 문재인 전 대표는 세간의 평을 빌어 말하자면 ‘부자 몸조심’ 하느라 그런지 정책적 쟁점에 대해 길게 토론하기를 꺼려 왔다.

위기를 ‘좋은 약’으로 만드는 것은 유능한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다. 앞으로의 비전에 대한 토론은 상대의 ‘의도’를 문제 삼는 것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면 협치나 연정보다 중요한 것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가 아니겠는가. 경선 과정에서 안희정 충남지사가 제기한 대연정 구상의 문제도 그런 것이었다. 180석에서 200석에 이르는 사실상의 ‘여당’을 국회 내에 형성하고 나머지를 ‘비정상’으로 만드는 걸 우리 정치 현실에서 어떻게 ‘협치’로 부르겠는가. 야당이 야당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해주고 반대세력의 견제를 묵살하지 않는 것이 ‘박근혜 정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문재인 전 대표는 경선 과정에서 안희정 지사와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다 “당정분리는 우리 현실에는 안 맞았다”고 발언했다. 참여정부 그가 겪었을 일들을 헤아려 보면 문재인 전 대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평적 당청관계’는 박근혜 정권 내내 요구됐던 기본적 정치상식과 같은 것이었다.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이 있을 때에야 국민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 이제 이걸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정권의 향방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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