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기성체제를 너무도 불신한 나머지 오히려 거짓을 사실로 믿는 세태에 대한 말이다. 이는 세계적 현상이다. 대표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인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언론을 ‘가짜 뉴스’라고 우기고 지지자들은 이에 환호한다. 급기야는 FBI와 CIA의 수사마저 ‘음모’라고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통령이 FBI와 CIA를 믿지 못하면 국정 운영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정도다.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눈을 돌려도 비슷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뒤늦게야 나오는 이야기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기득권이 자신의 권력을 빼앗기 위한 음모를 꾸며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어 냈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 게 아닌가 의심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런 음모론적 인식을 갖고 있으려면 스스로 한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다는 일들에 대한 해석은 어떤 고도의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는 결론은 우리가 그간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대통령을 그간 모셔왔다(?)는 어이없는 진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수감됐음에도 거리를 헤매는 ‘아스팔트 우파’들이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그 숫자가 줄어든 것은 분명하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 직후 거리에서 벌어진 집회에서 폭력행위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정광용 박사모 중앙회장이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고 ‘가짜뉴스’의 유통에 관계했다는 의혹을 받는 신연희 강남구청장이 선관위 조사를 받게 되면서 이런 흐름은 더 가속화되고 있다.

대통령 탄핵무효 국민저항총궐기 운동본부' 회원들이 2일 오후 2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태극기집회를 연 후 행진하고 있다.(연합뉴스)

남아있는 이른바 친박단체들은 뜬금없게도 봉하마을로 달려가 시위를 이어가는 모양이다. 왜 하필 봉하마을인가? 차기 대권주자 1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견제함과 동시에 ‘우리더러 문제라지만 너희는 더 문제 아니더냐’라는 인식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닐까 한다. 이런 바닥 민심(?)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서로 이심전심 호응하기로 약속을 해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유한국당의 대선 후보인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보수 대 친노’의 선거구도를 만들기 위해 매일같이 상식을 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일명 ‘포스트 트루스’의 안타까운 모습은 이른바 구 야권이라 불리는 정치적 자장 내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관측된다. 최근 이들의 관심은 언론이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보도하느냐에 쏠려있다. 가장 큰 파장은 문재인 전 대표 지지자들의 움직임으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감시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신문의 어느 기자가 문재인 전 대표에 과도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그가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의 지지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서사를 즉석에서 생산해낸다. 단지 편향적 태도를 지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문과 기자가 갖고 있는 ‘배후의 욕망’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언론이 내세우는 저널리즘의 명분은 사실상 거짓이며 오직 어느 누구의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서만 동작할 뿐이다.

어느 신문은 이들의 세계에서 이미 ‘친 안철수 신문’이 되어 있다. 이 ‘친 안철수 신문’에 문재인 전 대표에게 이득이 되는 기사나 칼럼이 실리면 ‘정론’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이 신문을 ‘친 안철수 신문’으로 묘사하기 위해 동원됐던 근거들 중 일부는 자연스럽게 기각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그렇다면 애초에 그 신문을 ‘친 안철수 신문’으로 판단한 근거를 그들 자신도 완전히 믿은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

정치권은 이들의 이런 극성스런 태도를 ‘친문 패권주의’를 증거 하는 것으로도 보는 모양이다. 어느 정치인은 친문과 친박을 ‘패권주의’라는 키워드로 묶어 ‘비패권지대’를 구축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세상만사에 대한 이런 기만적 태도는 정파불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안철수 전 대표의 지지자들도 똑같은 행태로 일관하기는 마찬가지다. 문재인 전 대표가 더 많은 열성적 지지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띌 뿐이다. 이런 세태 덕에 어느 기자는 ‘안빠’라는 비난과 ‘문위병’이라는 조롱을 양쪽에서 동시에 받는 웃지 못할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독자를 탓하기 전에 돌아봐야 할 것은 이미 기성 정치와 언론이 이들 인식의 근거를 제공해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최근 안철수 전 대표 띄우기에 여념이 없는 보수언론의 태도를 보라.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언론이 어느 후보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지지 후보를 공표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이 언론의 태도가 공정했는지, 이 과정에 최소한의 공공성이 담보됐는지가 문제이다.

최근 보수언론은 안철수 전 대표가 국민의당 경선에서 돌풍을 이어가고 있고 여론조사 상의 지지율이 상승하였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이런 저런 평가를 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안철수 전 대표가 어떤 비전을 내놓고 있다는 점을 먼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가 양자대결에서 문재인 전 대표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기본 조건으로 놓고 이를 현실화 하기 위해서 어떤 비전을 내세워야 하는지를 논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안철수 전 대표를 통해 보수재집권의 효과를 누리려는 ‘훈수’이다. 이는 단지 해석이 아니다. 자신들이 직접 실토하고 있다.

3월 28일자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이미 이런 식인데 누가 언론 보도의 어떤 순수성(?)을 믿겠는가. 즉 가짜뉴스와 음모론,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문제 삼는 오늘날의 세태는 기성체제가 이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의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은, ‘포스트 트루스’의 현실은 분명 낯설고 곤혹스러운 세계이지만 결국 이를 돌파할 기회는 정치와 언론이 스스로 존재 의의를 분명히 하고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천박한 정치적 관성과 결별해야 한다. 공공성 강화를 위해 실체적 공정성을 잃지 않는 저널리즘의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누군가에겐 득이 되고 실이 되는 당장의 현실이 멀지 않은 미래에 부메랑이 되어 똑같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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