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_ 과거 텐아시아, 하이컷 등을 거친 이가온 TV평론가가 연재하는 TV평론 코너 <이주의 BEST & WORST>! 일주일 간 우리를 스쳐 간 수많은 TV 콘텐츠 중에서 숨길 수 없는 엄마미소를 짓게 했던 BEST 장면과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WORST 장면을 소개한다.

이 주의 Best: 첫 회부터 강속 돌직구! <귓속말> (3월 27일 방송)

SBS 월화드라마 <귓속말>

소신 강한 판사가 한 명 있다. 대법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대법관의 사위를 법정 구속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어느 날 그는 한 사건을 맡게 됐는데, 아버지가 살인 누명을 썼다면서 증거를 가져왔다.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눈에 보이는 증거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판사 재임용 탈락, 소명 기회 박탈이라는 위기에서 그는 소신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배후 세력이 써준 판결문을 그대로 읽으면서 진실을 외면했다.

근성 강한 경찰이 한 명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살인 누명을 쓰고 구속된 아버지를 TV에서 보게 됐다. 아버지는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언론인이었고, 어떤 진실을 파헤치던 중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딸은 사건 담당 판사를 찾아가, 사건 당일 아버지의 통화 기록을 제시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누명은 벗겨지는 줄 알았으나, 판결 당일 판사는 진실이 아닌 권력의 편에 섰다. 복수를 다짐했다. 국내 최대 로펌 변호사가 된 그의 비서를 자처하며, 바로 옆에서 그의 목을 옥죄기 시작했다.

현실이 아니다. 분명 드라마다. 그러나 현실 같다. 판사의 신념, 해직 언론인의 소신, 경찰의 끈질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거대 권력의 음모. <펀치>, <추적자>, <황금의 제국>을 집필한 박경수 작가의 신작인 SBS <귓속말>은 쉬지 않고 현실을 향해 ‘펀치’를 날리며 진실을 ‘추적’해갔다.

SBS 월화드라마 <귓속말>

아버지 신창호(강신일)가 살인죄 누명을 쓰는 모습을 지켜본 경찰 신영주(이보영)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힘, 권력, 모두 나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데”라고. 신영주의 대사는 대사에서 머물지 않았다. 국내 최대 로펌인 태백의 대표이자 신창호 살인사건의 배후 세력인 최일환(김갑수)의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는 신창호를 살인범으로 만들기 위해 소신 있는 이동준(이상윤) 판사에게 손수 판결문까지 써서 건네며 “자네는 법봉만 두드리게”라고 주문했다. 이동준 판사는 정말 그 판결문대로 판결했다. 신영주의 말대로,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 가지고 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동준의 아버지(김창환)는 또 어떤가. “VIP(대통령)에게 청진기를 댈 수 있다”는 이유로 아들을 정략결혼 시키려 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증거는 외면하지 않겠다”는 이동준의 소신은 태백이라는 거대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의 결백을 밝히려 했던 신영주의 신념은 “파면”당했다. 파면, VIP 주치의, 증거, 판결문. <귓속말> 시청자들은 이것이 비단 드라마 속 이야기만이 아님을 직감한다. 배우들이 읊는 대사가 누구를, 또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대사가 품고 있는 함의들을 되새김질하는 순간, 소름이 돋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귓속말>이 첫 회 만에 이렇게 휘몰아 칠 수 있었던 건, 무섭도록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쉽게 현실에 편승해 소위 ‘대사 패러디’ 같은 얄팍한 수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소신과 신념이 권력 앞에서 어떻게 무력화 되는지를 우직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신념도, 소신도, 가족도 지키지 못하는 현실. 박경수 작가의 신작답게 첫 회부터 강속 돌직구를 날렸다.

이 주의 Worst: 살림하는 남자는 어디에? <살림하는 남자들2> (3월 29일 방송)

일라이 부부의 결혼식 준비 과정, 정원관 부부의 데이트 현장. 우리는 어디서 ‘살림’하는 남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살림하는 남자들2>는 갈 길을 잃은 것 같다.

KBS2 예능프로그램 <살림하는 남자들2>

연예인 부부 예능이었다면 충분히 나왔을 법한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프로그램 제목부터 ‘살림하는 남자들’이다. 남자 출연자에 초점을 맞춰 그들이 일상에서 살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콘셉트다. 그러나 백일섭을 제외한 나머지 출연자들에게서는 도통 ‘살림’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살림하는 주체는 시어머니의 방문에 “예쁜 짓 하는 며느리”, 일라이의 아내였다.

프로그램 정체성보다 더 큰 문제는 홍혜걸-여에스더 부부의 진행 방식이다. 사실 진행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사담 수준이다. 화면 하단에 등장해 출연자들의 영상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말하자면 과거 <우리 결혼했어요>의 MC들이 했던 방식의 진행이다. <우리 결혼했어요> MC들은 가상 부부가 얼마나 알콩달콩하게 신혼생활을 해 나가는지, 중간 중간 부러움 혹은 질투 섞인 리액션까지 해가면서 시청자들이 충분히 가상 결혼생활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홍혜걸-여에스더 부부는 남자 출연자가 어떻게 아내와 함께 살림을 꾸려나가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출연자들을 보면서 ‘우린 예전에 어땠지?’라며 추억소환 수다를 떨고 있다. 시청자들이 궁금한 건 이 부부의 과거 이야기가 아닌데도 말이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에피소드가 나올 때마다 ‘당신이 예전에 웨딩드레스 입었을 땐 어땠다’는 둥, 가끔은 출연자들 분량보다 그들의 에피소드 토크 분량이 더 많게 느껴질 때도 있다. 시청자들이 집에서 TV보면서 옆에 앉은 남편 혹은 아내와 나눌 법한 이야기를, 굳이 방송을 통해 재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KBS2 예능프로그램 <살림하는 남자들2>

지난 29일 방송에는 그런 토크가 많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최근 방송분을 모아 보면 홍혜걸-여에스더 부부가 가부장적인 대화들을 나누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시댁을 방문한 일라이 부부 편이 그랬다. 홍혜걸-여에스더 부부는 일라이의 일거수일투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일라이 아내가 시어머니를 도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지, 계란 후라이를 하겠다고 나선 남편에게 까다로운 주문은 하지 않는지 등을 지켜보면서 훈수를 두기 바빴다. 프로그램 콘셉트대로라면 아침 요리를 하는 일라이의 모습은 지극히 방송에 충실한 모습이다. 하지만 홍혜걸-여에스더 부부는 ‘감히 남편이 계란 후라이를 하는데 아내가 계란 스크램블을 요구해?’라는 태도로 일라이의 아내를 지적했다.

이럴 거면 프로그램 제목을 ‘살림하는 며느리’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졸혼의 아이콘으로서 요리, 혼밥 등 매주 살림 미션을 착실히 수행하는 백일섭이라도 없었다면, <살림하는 남자들2>는 그저 그런 부부 예능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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