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A spectre is haunting Europe) 이 말은 1848년 2월 나온 공산당 선언의 첫머리 글이다. 프랑스 왕정이 무너진 직후 유럽 각지에서 노동자 폭동이 일어나 유럽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상황, 변화하는 시대의 징조를 극적으로 예고해주는 역사적인 표현이다. 이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교황과 짜르.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경찰까지 구 유럽의 열강과 제 세력들이 동맹을 맺었으나 세계는 이 새로운 유령의 침습을 막지 못했다. 고통의 삶을 이어가던 당시의 노동자들도 새로운 흐름이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같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배심제 시행과 사회적 신뢰

지난해부터 몇 차례의 모의 시민배심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민의 배심 참여에 의한 재판이 우리나라에서도 곧 시행되기 때문이다. 중요 형사사건에 대해 유무죄 여부를 시민배심원이 판단하는 이 재판제도는 그동안 법률 전문가에 의해 독점되었던 재판 과정에 시민이 참여한다는 점, 검찰이나 변호인이 재판장을 향해서가 아니라 시민의 양식과 상식에 입각한 판단을 하게 될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해 법정 진술을 한다는 점에서, 재판의 형식 뿐 아니라 재판 과정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데도 큰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 중앙일보 5월1일자 6면.
이 시민배심제는 원래 지역 주민의 참여와 사건과 당사자를 잘 아는 동료에 의한 재판이라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해당 사건을 잘 아는 이웃에 의해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과 이웃들의 양식과 상식에 의한 판단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그 사회의 합리성과 신뢰의 기반을 보여준다. 이 배심제의 기원은 원래 신판(神判, ordeal)에서 유래했다 한다. 합리적인 사법제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인 15세기 중세 때까지 영국에서는 고문 형벌을 견디느냐 여부로 유무죄를 가렸다. 다툼이 있을 때, 뜨거운 인두로 몸을 지져 3일 후에 상처가 덧나면 유죄, 괜찮으면 무죄 방면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상처의 치유 여부를 신의 뜻으로 읽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 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것이 현재의 배심제라고 한다.

대통령 선거 시기가 되면, 우리의 대통령 임기가 5년인 까닭으로 5년 단위로 새로운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애쓰게 된다. 그런 이유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 따위의 말들이 생겨났다. 대선을 한 달 남겨놓은 지금 습관적으로 다음 정부의 시대적 의미는 무엇이고 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무엇이고 등등이 떠올랐다가 이내 그 자리에 가늠되지 않는 유령들이 자리하고 만다.

‘장막’을 제거하기보다는 더 짙게 치려는 언론

▲ 한국일보 11월22일 3면.
21세기 두 번째 대통령 선거판에 웬 유령들이 이렇게도 많은지? BBK 등 이름 모를 영어 유령부터 유령에 의한 주가 조작, 위장 취업에 따른 유령 직원, 문제제기하는 쪽의 발표에 대해 그것이 조작 또는 공작에 의한 것이라는 역문제제기 등 진실과 허위의 실체를 덮는 모호한 유령들이 꽉 끼어있어 도무지 시대적 징표를 읽고 말고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연일 매시간 뉴스와 신문에 쏟아져 나오는 폭로와 이를 부인하는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사건 관련 내용들은 향후의 대선과 한국사회의 미래에 큰 관련성을 갖는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언론들은 이 유령의 장막을 걷어내는 게 아니라 장막을 더 짙게 치려하는 듯 보이고, 검찰 등 수사기관의 움직이는 모습도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 유령의 장막만 걷어내면 맑은 가을 하늘처럼 뚜렷이 볼 수 있을 것 같은 국민들의 눈과 가슴을 침침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 이제 내가 재판관이 되어야겠다. 시민의 양식과 상식을 갖춘 눈으로 보면, 스스로 자기 눈을 감지만 않는다면 밝게 못 볼 리가 없다. 유령과 거짓의 장막 뒤에 있는 진실을 볼 수 있는 자신의 눈이 문제다. 어리석은 듯, 전문성이 없는 듯, 갖은 세파에 왔다갔다 가치관의 정립이 뚜렷하지 않은 듯, 우리가 항상 주위에서 보는 우리의 이웃들, 평범한 필부필부들이 유령과 거짓을 걷어낼 수 있는 배심원이다. 아니 구차한 진실공방을 넘어서 앞으로의 5년 10년 다음 세대, 다가올 시대의 징조와 새로운 가치를 읽어내야 할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그래 6백 년 전의 영국으로 돌아가,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진실을 숨기고 부인하면서 맷집이 좋아 견뎌내면 무죄가 되는 신판(神判)의 역사를 다시 되풀이해서야 되겠는가?

대학 때 총기독학생회장을 지냈다. 졸업 후 서울YMCA 청년회원 활동을 시작해 87년 간사를 거쳐 올해 7월 시민운동에서만 20년이 지났다. 소비자보호, 법률구조, 사법개혁, 방송개혁, 공정거래 등 시민생활의 크고 작은 일에 함께했다. 시민의 것을 빌려 쓰면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이들로 인해 피해당하는 시민 삶의 현장을 살피겠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민, 소비자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 알려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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