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철용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이 지난달 5일 서울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국회 법사위의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자료사진) ⓒ오마이뉴스 남소연

"언론들이 (미디어법과 관계된) 헌재 결정에 대해 '권한침해는 인정했지만 유효'라고 보도해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줬는데, 이번 결정 어디에도 유효라고 한 것은 없다."

헌법재판소 하철용 사무처장은 지난 16일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이 같이 밝혔다. 그는 또 헌재가 지난 7월 국회에서 강행 처리된 미디어법의 가결선포행위(유무효 결정)를 기각한 것은 "국회의 자율적 시정에 맡기는 게 옳겠다는 뜻이 분명히 들어 있다"고 전했다.

그의 이 발언은 지난 1개월여 헌재 결정의 애매모호함 때문에 여당이 '유효'의 명분을 쥐고 미디어법 재논의를 시작하지 않았던 것에 찬물을 끼얹는 격으로 향후 미디어법 재논의를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혼란의 책임을 언론에 떠넘기면서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피해가려는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비난도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1개월여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헌재놀이' 등 전 국민적 조롱거리가 돼버린 현실과 '헌재 무용론'에 따른 위기감이 작용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김승환 전북대 교수] 헌법재판소와 법원... 경쟁관계의 함수

김승환 한국헌법학회장(전북대 교수)은 "법관은 판결문으로 말한다"며 "그러나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은 아무리 읽어봐도 일반 국민은 물론 법률전문가들조차 그 의미와 효력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입을 뗐다.

김 회장은 "헌재가 미디어법 통과 과정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이 침해됐다고 인정은 했지만 가결선포행위에 대해 기각한 것은 결과적으로 무효도 아니고 유효도 아니다 이런 건데 그러면 이게 뭐냐 하는 국민적 혼란을 불렀다"고 비판했다.

헌법재판소는 이번 결정에서 미디어법의 유무효 문제는 국회의 자율적 시정에 맡기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지만, 국회는 미디어법 재논의를 하지 않고 있고 여당은 아전인수 격으로 '유효'라고 해석해 이 법의 통과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형국이다.

문제는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이나 한나라당, 김형오 국회의장 등의 잘못된 법해석에 대해 헌재가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1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하 처장이 내놓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헌법재판소가 카오스 상태로 결정해놓고 그 책임을 언론이나 국민에게 떠넘기는 것은 그야말로 염치없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무엇보다 헌재는 자신들의 결정이 잘못 회자되고 있다면 그때 당시에 자기변명을 했어야 옳은데 가만히 있다가 야당 의원이 따지니 소극적으로 답변하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결정 취지를 다시 한번 밝힌 것은 당당한 태도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게다.

헌법재판소 스스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반전을 꾀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김 교수는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내리면 그 청구를 인용하든 기각하든 설득력을 가져야 하는데 헌법재판소는 이번 미디어법 결정으로 계속 비판만 받게 됐다"며 "그렇게 되니 스스로 당황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김 교수는 "일각에서는 헌재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으로 판단하고 존폐론까지 제기하는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은 헌재로서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이강국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언론관련법' 국회 표결의 정당성을 가리는 권한쟁의심판 청구 사건에 대한 선고를 하기 위해 대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오마이뉴스 유성호
재밌는 점은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경쟁관계라고 진단했다.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에 대해 권한 침해는 인정해놓고 기각 결정을 내린 뒤에, 법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절차적 하자가 드러나면 바로 무효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게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의 해임취소 처분, YTN 해직언론인 6인에 대한 해고무효 결정, 신태섭 전 동의대 교수의 해임무효 대법 확정 판결 등이 그것이라고 증거를 댔다.

또한 야간집회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법원은 관련 법 개정 이전에 선제적으로 무죄 판결하고 있다. 이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라는 게다.

김 교수는 "헌법재판소와 법원이 극명히 대비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며 "헌법재판소에서는 이 같은 상황에서 위기감을 안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폐부를 찔렀다. 하 처장의 입을 빌어 헌재의 입장을 밝히는 방식도 사실은 상당히 조잡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 97년 '동성동본 금혼' 헌법불합치 결정의 기억

임지봉 서강대 교수도 김 교수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했다. 임 교수는 "헌재의 결정문은 정치세력마다 서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읽을 수 있도록 쓰여져 있다"며 "야당이 읽으면 야당에게 유리하고, 여당이 읽으면 여당에게 유리한 결정문"이라고 비판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에 의해 야당 국회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이 침해됐다고 권한침해는 인정해놓고 그 법의 통과에 대해 무효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결정이라는 게다. 결과적으로 헌재의 이 결정은 '여야 정치세력의 눈치 보기' 결과라고 질타했다.

임 교수는 "헌재가 애매한 결정을 내려놓고 지금에 와서 원래 우리 판결취지는 그게 아니라 이거였다고 나서는 것은 여론의 향배를 보고난 뒤에 자신의 결정취지가 이거였다고 하는 건데 그것은 상당히 잘못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최고법원의 최종심을 담당하는 판결은 간단명료해야 한다"며 "국민이 만든 헌법을 적용하는 헌법재판이기 때문에 판결의 취지를 일반국민 누가 보더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헌재의 이번 결정은 그 자체가 애매모호했고, 이제 와서 마치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밝히는 것은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행위라는 것이다. 애초에 간명하게 내려졌어야할 결정을 아주 비비꼬아 애매하게 해놓고, 나중에 문제가 파생되니 그것을 전파한 언론의 책임이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헌재의 결정 취지가 언론의 잘못된 보도 때문에 왜곡되고 있다면 그 즉시 수정했어야 옳다고 지적했다. 헌재는 이미 97년 동성동본 금혼에 관한 결정 당시 잘못된 여론을 시정하기 위해 직접 나서기도 했다고 선례를 소개했다.

"헌법재판소는 97년 7월 16일 동성동본 금혼에 관한 민법 제809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98년 12월 31일까지 시한을 정하고 그때까지 국회가 이 법을 개정하라고 했다. 그때까지 개정하지 않으면 그 다음날인 99년 1월 1일부터 이 법의 효력은 상실된다고 천명했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헌재 결정의 취지를 잘 몰라 98년 12월 31일까지 이 법의 개정을 안했고, 다음날 이 법은 사문화됐다. 그런데 일부 국회의원들이 이 법이 사문화된 줄도 모르고 개정하겠다고 나선 게다. 그때 헌재는 즉각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99년 1월 1일부터 이 법은 사문화 됐고, 이 법이 살아 있다는 전제로 개정 운운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이다."

임 교수는 이 선례를 전하면서 이번에도 헌재는 여론이 잘못가고 있다고 판단했으면 즉각 교정에 나섰어야 했는데 국회에서 물으니까 수동적으로 우리의 취지는 이거였다고 말하는 것은 전례에 비춰봐도 옳은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 누가 헌재 결정은 유효라고 부추기고 단정했나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는 "헌재 결정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있었는데 그 본뜻을 밝혔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발언"이라며 "헌재가 유효하다고 한 적이 없다면 무효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한나라당은 헌재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행 미디어법은 무효라는 것이 헌재의 결정인 만큼 그 전제 위에서 미디어법에 대한 재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럼 헌재는 이렇게 명확한 것을 두고 왜 지금까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모호한 표현과 용어를 써서 국민적 혼란을 부추겼느냐, 이 점은 결과적으로 헌법재판소가 정치권 눈치 보기를 한 결과라고 스스로 자임한 꼴이라고 비판했다.

홍 교수는 "국민을 혼란을 빠트린 책임은 1차적으로 헌재에 있다"며 "법조인이나 언론인, 전 국민들이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모호한 표현을 쓴 것은 헌재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홍 교수는 "이제라도 누가 헌재의 결정을 유효로 만들었나 그 책임을 따지는 본격적인 논란을 벌일 필요가 있다"면서 "조중동 등 종합편성채널 사업에 진출하려는 보수언론들이 앞다퉈 1면 머리기사와 사설 지면 등을 동원해 '헌재 결정은 유효'라고 쓰고 논의를 확산한 책임을 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이번 헌재 사무처장의 발언은 헌재 결정의 취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격"이라며 "한나라당은 더 이상 명분 없는 이 법안의 통과를 주장할 게 아니라 본격 재논의를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발뺌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게다. 그 자체로 법을 무시하는 격이 된다고 비판했다.

김 처장은 "헌재의 결정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것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국회가 다시 이 공을 넘겨받아 재논의에 나서고 위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과 김형오 국회의장이 계속 발뺌하는 것은 더 이상 명분도 없다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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