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Genre?

이제 타란티노를 하나의 장르로 규정해야 합니다. 더 이상 그의 영화를 기존의 장르형식으로 재단하는 일은 무의미하거든요. 액션이건 코미디건, 호러건 범죄물이건 타란티노의 손을 거친 장르는 타란티노 스타일로 재탄생됩니다. 그의 신작 <바스터즈:거친녀석들>은 타란티노식 장르 변환이 궁극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인데요. 일반적으로 전쟁 영화는 장르적 관습이 공고한 영역입니다. 여기에 전쟁 영화의 소재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작자의 활동범위는 현저히 제한될 수밖에 없죠. 때문에 많은 영화팬들은 타란티노식 장르 연금술이 이번에는 어떻게 작동될지 궁금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기대는 '설마'에서 '역시나'를 거쳐 '브라보'로 마무리됐습니다. 타란티노의 상상력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고정관념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기에 충분했고, 그의 이야기 구성 능력은 3-4백년 된 만수산 드렁칡 뿌리를 깔끔하게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했습니다.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상상력은 이야기를 짜내는 솜씨 좋은 직물공의 기예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스터즈:거친녀석들>가 만들어낸 타란티노 장르는 쾌감의 예술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Imagination: Pleasure of Art

▲ 영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포스터
MTV로 대변되는 현대 대중문화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문화입니다. 이미지는 텍스트보다 훨씬 더 즉각적인 자극을 유발하죠. 때문에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예전보다 더욱 단편적이고 강렬한 쾌감을 대중에게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중문화 비판이 뒤따랐습니다. 의미는 사라지고 쾌감만 남아버린 대중문화는 저질문화라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하지만 영상 세대가 바라보는 시선은 기존의 대중문화 향유자와 방향 자체가 달랐습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문화가 메시지와 의미에 중점을 두고 쾌감과 자극을 부차적인 요소로 바라봤다면, MTV문화는 쾌감 자체에 집중한 것이지요. 그들은 상상력을 통해 더 강력한 쾌감을 창조했고, 쾌감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습니다. (물론 기존의 코드-섹스나 폭력 같은-를 예측 가능한 상태로 이용한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이런 방식의 쾌감은 저급의 쾌감 창출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쾌감의 예술이 탄생한 것입니다.

타란티노의 상상력은 이미지의 쾌감을 극한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심오한 이야기나 무거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는 관객의 염통을 쥐락펴락 하며 긴장감을 높였다가 한 번의 임팩트로 관객들의 아드레날린 분비 수치를 극대화하고자 합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독일군 장교 한스와 프랑스인 농부가 긴 대화를 나누는 장면. 겉보기에는 평범한 대화 같지만 관객의 염통은 격렬하게 벌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잔잔한 고요 속에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맴돕니다. 그 때 이어지는 단 한 번의 일격! 지하에 숨어 있는 유대인을 향해 독일군이 기관총을 난사하는 모습을 부감으로 잡습니다. 마치 방광 속에 가득 찬 오줌이 단 한 순간에 뿜어져 나올 때 발생하는 원초적 쾌감이 느껴집니다.

비슷한 장면 하나 더. 독일군 장교와 영국군 스파이가 술집에서 시답잖은 게임을 하며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는 꽤 길게 이어집니다. 긴장감은 서서히 고조됩니다. 그리고 한 방의 총격전! (이 장면은 매우 짧은 컷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10명 가까이가 칼로 찌르고 총을 쏘는 아수라장의 상황을 표현한 방식은 정말 예술이었죠!) 잔잔하게 울리던 북소리가 단 한 순간에 격렬한 북 군무의 웅장한 소리로 확장되듯, 쾌감도 순간적으로 증폭됩니다. 타란티노의 상상력은 영상 이미지가 전달하는 쾌감을 자유자재로 조절했습니다. 이쯤 되면 영상의 쾌감이 제공하는 단순한 즐거움은 이제 예술 작품이 전해주던 숭고한 감동의 수준으로 격상됩니다.

Storytelling: Elaborate Structure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란티노는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예술가입니다. 상상력, 자유분방함, 혼란, 무질서를 의미하는 디오니소스의 에너지가 이미지를 이용해 극한의 쾌감을 뿜어냈다면, 합리성, 엄격함, 정돈, 질서를 의미하는 아폴론의 에너지는 세밀하게 구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펄프픽션>때부터 타란티노는 옴니버스 형식이 연상될 정도로 독립적인 사건들과 다양한 등장인물로 이야기를 끌어갔습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역시 마찬가집니다. 독일군 장교 한스 일당, 바스터즈 무리, 영국 스파이, 쇼사나와 그의 연인, 그리고 괴벨스에 히틀러까지, 챕터가 진행될수록 등장인물과 사건은 늘어가고 이야기는 점점 확장됩니다.

보통 이야기의 구성은 인과와 논리가 필수적입니다. 급격한 비약이나 비논리적 전개는 관객들을 이야기에서 분리시키죠.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관객들에게 영화 속 이미지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야기와 관객이 분리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관객을 고문하기 시작하고, 이에 관객은 쌍욕으로 영화에 화답하게 됩니다. 때문에 타란티노의 영화처럼 등장인물과 사건이 많아지고 복잡해진다면, 자칫 관객들을 이야기의 안드로메다로 관광 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말러의 복잡한 교향곡이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선사하듯, 마에스트로 타란티노는 다양한 인물과 복잡한 사건을 정교한 이야기의 틀 속에 넣어 깔끔하게 마무리합니다. 각각의 챕터는 독립적인 단편 영화로 봐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완결성을 지니고요. 각각 분리된 챕터들은 전체적인 구조에서 유기적으로 엮여있습니다. 얼핏 보면 난장판 같지만, 이 모든 게 엄격한 이야기꾼이 만든 정계한 설계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죠. 특히 영화의 마지막, 챕터5는 14구 멀티 탭에 어지럽게 꽂혀있는 전원 코드들을 코드 클립으로 깔끔하게 정리한 뒤에나 맛볼 수 있는 쾌감을 선사합니다. 이미지가 즉각적인 쾌감을 불러왔다면, 이야기는 지적인 쾌감을 가져온 것입니다.

▲ 영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스틸컷

Spirit of B-Movie

타란티노의 영화는 B급 영화의 감수성과 맞닿아있습니다. 애초 B급 영화라는 명칭은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작품에 붙은 부정적 꼬리표였죠. 하지만 B급 영화들은 오히려 저예산의 한계를 뚫기 위해 더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했습니다. 제작자의 간섭이나 따라야 할 장르적 관습도 없었기에, 표현 영역도 훨씬 넓었습니다. 그들에게 영화는 무엇으로도 가득 채울 수 있는 하얀 도화지였습니다. 펜을 잡은 손은 도화지 위를 자유롭게 활보했습니다. B급 영화는 거침없이 당돌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타란티노의 상상력과 이야기 구성력은 활개를 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위대함은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던 사실을 무시할 수 있는 당돌함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보면요. '모든 2차 대전 영화가 지켜왔던 금기 하나를 가볍게 무너뜨리는 대목에선,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찬탄을 보낼 수밖에 없다.' (백승찬 <경향신문> 기자)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구체적 시공간을 무대로 삼고도, '역사적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수 있는 대담한 상상력' (이동진, 영화평론가) 영상 쾌감의 극한을 보여준 그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촘촘하게 짜내는 글쓰기 능력이 발휘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타란티노의 B급 정신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장르로서 타란티노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요? 타란티노 드라마(Tarantino Drama); (명사) <연영> 1)B급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장르적 관습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2)극한의 영상 쾌감과 탄탄한 이야기 구성을 유지하는 영화, 즉, A급과 B급의 경계에 자리 잡은 대중극. 이제 타란티노는 하나의 장르입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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