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변화하는데 있어 운동선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전부터 가져왔던 의문이었습니다. 사실, 운동만 강요하는 우리나라의 현 체제 내에서 운동선수의 사회변혁적 힘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이 가지는 명사성(celebrity)과 미디어의 관심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힘을 전혀 기대하지 못할 바도 아닌 듯싶습니다. 오늘은 사회변화를 위한 스포츠의 역할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사회를 변혁해보려 했던 지난 68년의 멕시코 올림픽 사례를 중심으로 몇 자 적어보려 합니다.

인종차별에 저항한다!

▲ 토미 스미스(가운데)와 존 카를로스(오른쪽)
먼저 사진을 보시죠. 낯익은 사진인 분도, 처음인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시상식 장면인 것 같은데요, 신기하죠? 흑인 두 명이 손에 검은색 장갑을 끼고 번쩍 들고 있고, 고개는 숙이고 있네요. 국기를 바라보지 않겠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국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다름 아닌 지난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있었던 남자육상 200m시상식 장면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미국육상선수였던 토미 스미스(Tommie Smith)와 존 카를로스(John Carlos)인데, 1위가 스미스, 3위가 카를로스입니다. 2위의 백인은 호주의 피터 노먼(Peter G. Norman)이라는 선수로서, 이 시상식 퍼포먼스에 동조하면서 약간의 도움(?)을 주기도 하였지요. 이 선수, 조금 후 다시 언급됩니다.

그렇다면 왜 1위와 3위의 흑인선수들이 미국의 성조기를 바라보지 않고 한 명은 오른손을, 다른 한 명은 왼손을, 그것도 손에 검은색 장갑을 끼고 치켜 올렸을까요? 그렇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1960년대 미국사회에 팽배해 있던 인종차별의 문제를 표명하고, 거기에 저항하고자 올림픽이라는 “정치적으로 순수한”(?) 공간에서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었습니다. 이름하야, “미국에서 자행되는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죠.

검은색 장갑의 의미

사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몇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기에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등을 한 스미스를 보면 오른손에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잘 구별이 가지 않지만 목에 검은색 스카프를 둘렀으며, 왼손에는 무슨 상자 하나를 들고 있습니다. 3위의 카를로스의 경우에도 왼손에 검은색 장갑을, 마찬가지로 검은색 양말을 신고, 은색 목걸이에 윗 점퍼를 단정하게 잠그지 않고 풀어헤쳤습니다. 나아가 2위의 노먼 선수를 포함, 세 선수 모두 왼쪽 가슴 쪽에 흰색의 원형배지를 달고 있네요. 사진의 모습을 대략적으로 묘사해보면 이렇습니다. 말씀드린 이들 각각의 요소는 모두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잘 보이시지 않겠지만, 이들이 신었던 검은색 양말은 ‘흑인의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미스의 목에 두른 검은색 스카프는 ‘흑인의 자부심’을, 왼손에 들고 있던 흰색상자는 올리브 나무 묘목이 담긴 것으로서 ‘평화의 상징’이었으며, 손에 낀 검은색 장갑은 ‘우리는 흑인이다’를 상징한 것입니다. 카를로스가 목에 걸고 나온 은색 목걸이는 고통 받는 흑인을 상징하고, 풀어헤친 윗 점퍼는 미국 노동자들과의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왼손에 낀 검은색 장갑 역시 미국의 흑인들의 단결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하죠.

재미있는 점은, 이 둘이 검은색 장갑을 각각 오른손과 왼손에 끼고 있는 것인데, 혹자는 이것이 “오른손의 검은색 장갑은 흑인의 힘을, 왼손의 장갑은 흑인의 단결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시던데, 사실은 이렇게 양쪽에 낀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사실, 이 퍼포먼스가 기획되고 난 후 이 둘은 검은색 장갑을 모두 준비했다고 하죠. 그런데 카를로스가 당일 장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난감해하고 있던 찰나에 옆의 노먼 선수가 “스미스의 것을 양손에 나눠 끼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고, 그래서 스미스는 오른손에, 카를로스는 왼손에 장갑을 나눠 낀 것입니다. 노먼도 저항에 한 몫 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 세 명의 선수가 공통적으로 왼쪽 가슴에 단 배지도 설명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이는 인권을 위한 올림픽 위원회(Olympic Committee for Human Rights; OCHR)를 상징하는 배지였습니다. 미국의 흑인사회학자인 해리 에드워즈(Harry Edwards)가 이끄는 흑인권리단체가 1967년 10월 7일 만든 위원회인데요, 인종차별과 탄압에 저항하고자 형성되었던 단체였습니다. 이 단체에서 만들어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인데, 신기하게도 2위를 한 호주의 노먼 선수도 이 배지를 차고 있습니다. 자신도 그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었죠.

이러한 상황이 적어도 흑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슴 저미고 뭉클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을 멋지게 표현해주고, 그것을 국제사회에 상기시켜줬기 때문이었죠. 소위 스미스와 카를로스가 어려운 일을 하고자 ‘총대’를 맨 것이었는데요. 하지만, 그 여파가 예상외로 컸습니다. 시상식이 끝나고 난 후 바로 다음날 이 둘은 올림픽 숙소에서 쫓겨났고,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미국 공항에 들어오면서도 수난은 계속되었는데, 이 둘은 미국백인우파단체들에 의해 토마토 사례를 받아야 했으며, 미국육상연맹에서 제명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이 둘의 행태가 “순수한 올림픽을 정치화했다”면서 여러 매체에 의해 비난받았습니다. 그냥 장갑 껴 주고 손 한 번 들어준 것 뿐인데(?), 그에 대한 대가가 의외로 컸던 것이죠. 정말 케안습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왜 이처럼 고단한 길을 택했나?

▲ 해리 에드워즈(왼쪽)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처럼 정치적 의사표현이 금지된 올림픽에서 이런 퍼포먼스를 했을까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 때 당시 흑인들에게 불평등하게 구조화되었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죠. 물론 처음부터 이들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자발성을 촉발시켜 주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흑인 운동선수이자 UC 버클리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해리 에드워즈였습니다. 1942년생이었던 에드워즈는 흑인으로서 미식축구와 육상을 하였고, 자신이 대학원생이었던 60년대 극심한 인종차별을 경험하였죠. 그래서였을까요? 그는 산호세주립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그곳의 스포츠 프로그램에 많은 흑인 선수들이 참가하도록 독려하였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 흑인과 백인의 평등한 지위가 스포츠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25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스포츠와 관련하여 흑인들에 대한 어떤 차별이 있었을까요? 에드워즈가 98년, 잡지「컬러라인즈(Colorlines)」의 편집장이었던 데이비드 레오나드(D. Leonard)와 가졌던 인터뷰 일부를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는 그 때 당시의 인종차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조금 길지만 모두 인용해보죠.

“(우리)흑인들은 기숙사에서 살지도 못했죠. 백인들이 싫어했으니까요. 또한 우리가 들어가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없었고, 캠퍼스 내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에 접근할 수도 없었어요....흑인으로서의 여성은 대학에 들어오기도 힘들었습니다. 오죽하면 우리(흑인)가 파티에 가 춤을 추게 되면 백이면 백 다 백인여성과 춤을 춰야 했죠. 흑인여성이 캠퍼스에 아예 없었으니까요. 더 가관인 것은 장학금을 받고 들어온 흑인선수들이 캠퍼스에서 쫓겨나기도 했거든요. 이유가 백인여성과 데이트한 걸 누군가 고소했기 때문이었어요....공부하는 것에서도 차별이 있었어요. 흑인들이 전공하길 강요받았던 과목이 뭔줄 아십니까? 사회복지와 체육, 범죄학이었어요.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사회복지는 흑인이 사회에 나가면 복지혜택에 의존해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체육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동선수로서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범죄학은 흑인의 속성상 범죄인이 되기 딱 알맞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었죠. 제가 하려 했던 사회학은 정말로 지원하기조차 힘든 전공이었습니다.”

대학시절 차별이 이 정도였는데, 대학 졸업 후 강사로 다시 산호세주립대에 돌아왔을 때에는 흑인에 대한 차별구조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흑인선수들에게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시키면서 나름의 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 과정에 알게 되었던 선수가 바로 맨 위의 사진에 있는 두 선수, 즉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였는데, 에드워즈는 특히 이 선수들이 흑인권리운동의 일환으로서 조직되었던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s; OPHR)의 적임자라고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들 중 특히 토미 스미스가 200m 육상경기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고(실제로 그는 도쿄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때문에 카메라의 주목을 많이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죠.

사실, 스미스의 경우 67년도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세계대학육상경기 후 일본기자가 “내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흑인선수들의 보이콧 가능성이 있는가”란 질문에 “몇몇 선수들이 그것을 원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라고 말했죠. 이 말이 나중에 다른 국가에서의 보도에서는, “스미스가 68년 멕시코올림픽 보이콧을 주도했다”는 식으로 나갔습니다. 역시 믿을게 못되는 언론인가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사 덕분에 에드워즈는 스미스를 눈여겨보았던 것이었고, 운동의 희망을 걸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1967년 11월 22일 OCHR 주최로 워크샵이 열렸습니다. 여기에 대략 50여명의 흑인 선수들이 참가했는데요, 이들을 대상으로 에드워즈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동물 취급을 받으면서 운동을 해야 하는가?”와 “내년 멕시코 올림픽이 우리의 힘을 보여줄 적절한 시기인가?”의 두 질문. 올림픽을 보이콧 하자는 제안이었죠. 물론, 모든 흑인선수들이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스포츠만큼 계층의 상승이동을 용이하게 해주는 기제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적어도 스포츠에서의 업적을 통해 우리가 “다른” 미국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죠. 가장 대표적으로 반대했던 이가 바로 미식축구 로스엔젤래스 램스(LA Rams) 소속의 데콘 댄 타울러(Deacon Dan Towler)였죠. 뿐인가요. 제시 오웬스(Jesse Owens)라는 육상선수 역시 보이콧에는 반대했습니다. 그의 반대이유는 하나였죠. “정치를 위해 운동세계에서 내 줄 자리는 없다.” 바로 이거였습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 데콘 댄 타울러(왼쪽)와 제시 오웬스(오른쪽)

어디 둘 뿐이겠습니까?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는 소식이 나가면서 미국 언론은 에드워즈를 ‘매국노’ 취급하면서 상당한 반대여론을 몰아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에드워즈는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을 경험하는데요, 급기야 살인협박까지도 받았다고 합니다. 8개월 만에 20kg의 살이 빠지는 고통도 감내해야 했고, 단체는 재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어려워질 수밖에 없게 되었죠. 결국, 8월 31일 세 번째로 열렸던 OCHR 컨퍼런스에서 에드워즈는 공식적으로 보이콧을 취하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집단반발로서의 보이콧은 취소되었지만, 각개전투식의 저항수단은 유효했죠. 이탈리아 정치학자인 그람시가 말했던 전면전을 취하하고, 각개전투로서의 진지전으로 인종차별에 저항하려 한 것입니다. 그 중심에 바로 스미스와 카를로스가 있었고, 이들은 자신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거나, 또 다른 퍼포먼스를 하겠다고 계획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앞의 그림에서 보는바와 같이 저항운동을 펼쳤고,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인종을 다루는데 있어 반(反)인륜적인 미국사회에 흑인의 위엄과 힘을 가시화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하면서 그 순간을 “흑인에 대한 차별의 변화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한 분수령”으로 판단했습니다. 사회변화에 운동선수가 일조를 한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네 선수들은 어떠할까?

괜히 이상한 곳으로 불평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 글을 쓰면서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바로 “우리나라의 선수들은 이처럼 사회변화를 위해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인종차별처럼 미국사회와 공유하는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사회 곳곳의 문제, 그 문제는 선수들의 인권과 관련된 문제일수도 있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전혀 다른” 분야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물론 우리도 할 수 있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고요? 다음의 그림을 봐주시죠. 지난 2007년 중국이 백두산을 자기네 산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아시안게임 주최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야함에도 불구하고 편파판정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해 선수들이 시상식에서 일종의 저항운동을 펼친 것인데요.

▲ 백두산 세레모니

이처럼 쇼트트랙 여자 3000m계주 시상식에서 벌어진 소위 “백두산 세리머니”로 인해 한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문제가 심하게 부각되었습니다. 물론, 이처럼 스포츠메가이벤트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행동에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활용해 사회변화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삼는 것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하시죠.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선수들이 이러한 스포츠의 장에서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저는 개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그들은 정녕 운동하는 기계가 아닌, 스스로의 삶을 조직하고, 개선해나가는 입장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스미스와 카를로스가 에드워즈의 선동과 교육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사회변화를 위해 쓴 것처럼, 우리의 선수들도 그러한 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문제부터 시작할 것이냐는 점이죠. 독도와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는 외교적 문제도 중요하겠지만, 저는 우선 선수들 스스로 그들이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바꾸려는 또 다른 “운동”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가령 인권침해의 상황이나 학습권을 박탈시키는 그런 구조적 문제, 초등학교부터 프로에 이르기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구장창 운동만 해야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 부상선수를 경기에 보내어 자신의 실적을 치장하려는 업적주의 중심의 스포츠 문화. 개처럼 맞으면서 운동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등 등 등. 이 모든 것들이 현재 우리나라 선수들이 직면한 ‘생존’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외부사람들의 노력뿐 아닌 자체적인 공부와 고민을 통해 보이콧이든 저항운동의 형식이든, 인터뷰든, 여러 매체를 통해 개진해나가는 것.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연아와 박태환, 박지성 같은 ‘권력을 가진’ 선수들이 “더 이상 맞으면서 운동하는 우리네 후배 선수들을 그냥 넘길 수 없다. 이러한 제도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010벤쿠버 올림픽도, 2012년 런던올림픽도, 2010년 남아프리카월드컵에도 참가하지 않겠다”란 기자회견을 연다면, 그건 정녕 선수 본연의 자세에서 이탈한 못된 짓일까요?

주변 사회조직에 휘둘리는 그런 유약한, 운동만 할 줄 아는 그런 천편일률적인 선수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힘을 집결하여 발휘할 줄 아는 그런 선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십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에는 ‘마라톤’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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