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가 중요해진 오늘날에는 키는 경쟁력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Loser,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미녀들의 수다>에 나온 한 여대생의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다. ‘홍대의 퀸카’라는 이 여대생은 인터넷에서 ‘홍대녀’, ‘루저녀’ 등으로 불리며 난타당하고 있다. 발언 자체로만 보자면, 당연하게도 불쾌한 이야기다. 선천적인 신체조건을 두고 경쟁력 운운한 무신경함이 그렇고,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패배자로 낙인찍은 그 대담한 발상이 그렇다.

사실은 ‘루저’ 발언 뿐 아니라 이 날 방송 전체의 내용이 시종일관 편견을 조장하고 남녀관계는 물론 여대생들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고착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몸단장을 하니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대야 한다’, ‘여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남자는 초기투자비용을 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 ‘미국 대학생들은 왜 핸드백을 안 매고 백팩을 매느냐’, ‘연애할 대상과 결혼할 대상은 조건에 차이가 있다’, ‘비싼 돈 들여 대학 갔는데 왜 아르바이트를 하느냐’ 등 여대생들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왜곡된 인식과 편견을 그대로 답습하는 내용으로 일관했다. 한국인이 들어도 황당할 법한 발언들에 미수다 멤버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하며 사사건건 각을 세우는 장면이 연출됐다. 애초에 이 프로그램이 가진 신선한 지점이 외부인의 시선을 통해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크게 이상한 구성이 아니었을 수 있다.

▲ '미녀들의 수다' 캡처ⓒKBS2

방송을 보면서, 또 방송 이후의 논란을 보면서 출연자들은 물론이고 논란에 참여하는 이들마저도 방송의 프레임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로그램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절대다수의 방송에서는 사전 대본을 준비한다. 특히, 여대생들이 단순 방청객이 아닌 유사 패널로 참여한 이번 프로그램에서 대본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대생과 제작진 간 대본유무 및 강요 시비는 그래서 별 의미가 없다. 일단 대본을 준비한 것은 제작진이고, 문제적 발언을 자막까지 친절히 새겨주며 그대로 방영한 것도 제작진이다. 물론,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해당 여대생의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 문제의 발언을 대본 그대로 읽었다는 해명도 구차하긴 마찬가지다.

사실,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루저’란 단어는 패배자라는 본래의 어둡고 무거운 의미보다는 개그의 소재로 전용된 지 오래 아니던가. 사실,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루저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이만한 반향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방송 전체를 보면 여대생들과 미녀들 사이의 의견대립과 종합으로 이어지는 구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프로그램 막바지에 한 여대생은 ‘모든 여대생이 오늘 나온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인식의 균형을 위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분히 ‘안배’의 냄새가 나는 이 발언은 제작진의 노력으로 봐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흐름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것을 제작진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여대생-미수다 멤버 사이의 대비를 이끌어 프로그램의 재미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은 여대생 발언의 노골성과 저열함으로 인해 본말이 전도되어 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변수가 개입한다. 그 속도와 범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언제나 놀라운 이슈 확산 능력을 보여주는 한국의 네티즌들이다. 더군다나 금단의 소재인 남성의 키 문제다. 더군다나 해당 여대생은 자신의 키가 170cm라며 180cm 이상의 남성이 적합하다는 턱없이 높은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던가.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유독 남성적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이슈의 폭발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180cm 이하의 남성들이여 단결하라! ‘미녀들의 수다’는 방송 하루 만에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더니, ‘미수다 루저’, ‘홍대녀’ 등이 검색상위에 랭크되고 각종 패러디물이 봇물 터지듯 넘쳐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젠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해당 여대생과 관련된 다수의 신상정보가 ‘털리는’ 일이 또 벌어졌다. 사안이 다르다고 하나 ‘개똥녀 사건’의 교훈이 여전히 한국사회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여대생이 ‘한국루저인증협회’ 회장이라도 되나? 해당분야 권위자인가? 정부인사인가? 아무리 공중파를 통해 방송됐다고는 하지만, 일반인의 한 마디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네티즌들의 ‘봉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방송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과 개인의 신상정보를 무차별로 유포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범죄’에 가까울까. 마초적인 인터넷 문화 일반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디씨 유저를 비롯한 일부 네티즌들은 ‘분노가 밑거름이 됐으나 이는 오히려 ‘놀이’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먹잇감을 포획해 질기게 갖고 노는 게 폭력이 아니라는 항변은 피해자에게는 2차 폭력일 뿐이다. 고양이는 종종 쥐를 잡고도 먹지 않고 ’가지고 논다‘. 이것도 쥐 입장에서 ’놀이‘라고 봐야 옳겠는가?

환원론이라 투덜거릴 이들이 있겠으나, 어쩔 수 없이 이 대목에서는 김수영이 떠오른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하략)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

‘루저’ 논란이 일파만파 번지던 11월 10일은 4대강 사업이 공식 착공하는 날이었고, 서해에서 남북 함정간의 교전이 있던 날이었다. 트리비얼리즘이 판치는 세태를 욕하며 중요한 이슈들이 충분히 조명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을 고리타분한 꼰대들의 언술로 치부해도 좋다. 그저 ‘루저 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김수영의 시 전문을 찾아 읽어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루저 발언’과 마초 네티즌들에 뒤지지 않는 언론들의 저열한 보도 행태다. 사건을 전달하는 객관적 목소리를 가장해 끊임없이 이슈를 ‘제작’해 내는 관행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 한, 유사한 논란은 반복될 것이고 불필요한 에너지들은 꾸준히 낭비될 것이며 어찌됐든 피해자 역시 속출할 것이다. 언론에도 ‘재범 사태’의 교훈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이 뼈아픈 까닭이다.

정리하자, ‘홍대녀 루저 발언’ 파문은 외모와 조건에 대한 왜곡된 인식, 방송의 실패한 프레임, 마초적인 인터넷 문화, 사건이 뉴스를 만드는 게 아니라 뉴스가 사건을 만드는 언론들의 보도행태에서 비롯됐다. 루저로 지칭된 이들이 피해자라고 우길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말 한마디로 신상정보가 유출되고 수백만명에게 일방적으로 매도되고 난타당한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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