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성격도 다르고 취향이나 지향하는 가치관도 각양각색이다. 성격따라 취향따라 가치관에 맞는 일을 직업까지 연계해서 한평생 그 일만 하고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때론 이런 이상과 무관하게 직업이란 걸 밥벌이삼아 보내기도 한다. 어린이와 관련된 일이나 복지 분야에서 종사하는 분들은 소명감이 투철한 사람들이라고 감탄하곤 한다. 사실 내 아이도 기르기 힘든데 남의 아이를 변함없는 사랑으로 품고 가르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일찌감치 결혼해서 연년생으로 딸아들 기르던 친구는 항상 이렇게 단언하곤 했다. “야, 애낳고 기르는 거, 그거 드라마처럼 고상하고 우아하게 ‘그랬니? 저랬니?’ 이렇게 안된다. 뭐 교양? 애가 말 안 듣고 징징거려봐라.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게 애 키우는 거다. 애 키우는 건 전쟁이야 전쟁!”

결혼 전, 전주에서 서울까지 주말마다 오르내리며 유명한 교수님으로부터 일정 기간 부모교육 훈련도 받았지만 결혼해서 출산하고 기르다보니 학벌도, 교양도 여지없이 무너지는 게 친구 말처럼 바로 애 키우는 일이란 걸 실감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들 둘 데리고 약속시간 맞추려다보면 진을 빼기 일쑤이고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쯤은 늦는 게 다반사였다. 한번은 이런 속상함을 토로하다 사회복지기관에 근무하는 선생님이 얼마나 기다렸느냐고 물어보기에 한 시간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생님,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 김사은 PD(왼쪽)와 작가지망생 현주(오른쪽). ⓒ전북도민일보 신상기 기자

“두 시간은 기다려줘야지요”

부모라면 두 시간은 기다려 줘야지 고작 한 시간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는 질책으로 받아들여져 내심 부끄러웠다.

유난히 부산스러웠던 두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아동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사람들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자유로운 영혼을 구속하지 않고 낮은 자세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고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보면서 유치원 교사야말로 적성에 맞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처럼 인내심과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절대 감당하지 못할 일이어서 거듭 존경심이 일었다.

최근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종합병원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중 장애인들 검진을 도와주는 사회복지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40대 여성 지체장애인이 검진을 거부하며 작은 소동을 일으키는 중이었고 20대의 여성 복지사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그 상황은 내가 분야별로 검진을 마치고 돌아올 때 까지 30분 여분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장애인을 인솔하고 온 서너명의 복지사들을 찬찬히 눈여겨보았더니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착하고 준수하게 생겼는지 진실로 선함이 몸에 가득 배어 있었다. (정말이다. 복지기관에 근무하는 분들의 인상은 대체로 선량하고 표정은 온화하다.) 타고난 성품이 착한 사람들이려니 싶었다.

방송에 있어서도 이처럼 공익분야에 종사하는 분들과는 더욱 허물없이 지낸다. 출연요청에 아무리 바빠도 흔쾌히 응해주고 나 또한 물질로 도와드리지 못하는 부분은 어떤 방법이든 기여하려고 노력하곤 한다. 얼마 전 이런 인연으로 만난 한국어린이재단 전북지역본부 나눔플래너 백승일 사회복지사가 전북도민일보와 함께 전북아이(I) 사랑(LOVE)캠페인을 펼치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해왔다. 장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생활하는 아동들 가운데 빈곤을 이유로 꿈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동기부여를 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는 기획 의도 아래 멘토를 주선해서 아동과 함께 유익한 시간을 보내는 일이란다. 시행중이거나 계획 중인 내용으로 아나운서와 간호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이미 만났고 축구선수와 양궁선수, 작가 등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멘토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방송을 계기로 나와 인연을 맺은 백승일씨는 이후 여러 보도자료와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전북여류문학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작가 지망생의 멘토가 되어달라고 부탁해왔다. 백승일씨는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어려운 가정환경속에서도 꿈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던 아이들이 멘토를 만나 좀더 확실하고 선명하게 꿈을 꾸기 시작했음을 느꼈다”며 “작가를 꿈꾸고 있는 현주가 피디님을 만나뵐 수 있다면 아이가 밝고 건강하게 성장하여 꿈을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간곡하게 부탁해왔다. 훌륭한 작가들도 많은데 내가 이 아이를 만나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부끄러웠지만 담당자의 정성에 굴복해서 작가지망생인 여고 2학년 현주를 만나보기로 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가출하고 중학교 때 아버지는 기차사고로 사망, 졸지에 소녀가장이 되어 동생 양육의 부담까지 안게 된 현주……. 작가가 꿈이라는 이 소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사뭇 긴장도 되고 만남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있었다. 현주도 나와 같았을까?

음식점에서의 첫 만남, 수줍음을 많이 타던 현주는 쑥스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하다가 마음을 열고 서서히 미소로 화답했다. 초등학교 때 인터넷에 소설을 게재하고 현재도 글짓기 등 각종 대회에 입상한 전력이 있는 현주는 동생을 위해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지금은 문예특기생으로 대학 진학의 꿈도 조심스럽게 키우고 있다. 작가의 종류도 많은데 어떤 작가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현주는 뜻밖에도 “작사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여고시절에 알고있는 작가는 시인, 소설가가 전부였는데 현주는 중학교 때부터 좋은 가사를 쓰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고 털어놨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라디오를 통해 들은 노래가 큰 힘이 되었다며 자신도 남에게 노래를 통해 힘을 주고 싶단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H.O.T>, 그들의 노래에서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고. 목표가 선명한 현주를 보니 생각보다 마음이 많이 놓였다. 방법과 절차는 달라도 결국 글을 통해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다른 게 없다는 생각에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서로 “감동을 주는 글”을 쓰자고 다짐했다.

나는 현주에게 김충현 춘천불교방송PD가 쓴 명상만화 <마음공부>와 지난해 전북여류문학회 동인지 <결>, 그리고 최근에 전주풍물시 동인회와 함께 작업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주풍물시동인회 시낭송 CD>를 선물로 주었다. <마음공부>는 친구이기도 한 김충현PD가 자신의 아들에게 주려고 쓴 글을 만화로 엮은 것이라서 현주의 아버지 마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되어 준비한 것이고 동인지나 CD는 내가 직접 작업한 것이라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선물을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있는 현주를 보니 이 일을 함께 해서 보람있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뒤 백승일씨는 현주와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액자에 넣어 신문과 함께 보내왔다. 사진 속 현주는 환하게 웃고 있다. 아마도 헤어짐이 임박한 무렵에 찍은 사진같다. 그즈음 우리는 제법 친해져서 농담도 주고 받았으니까. 사진을 들여다보니 방송으로만 떠들지 말고 이렇게 뭔가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라는 뜻이 전해온다.

여고 2학년 현주, 소녀가장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자칫 희망을 포기한건 아닐까 우려되었으나 그는 꿈많고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노랫말을 만들고 싶다는 현주, 그녀가 만든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또 다른 제2, 제3의 현주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주를 만나게 해준 한국어린이재단 전북지역본부 나눔플래너 백승일 사회복지사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현주야, 얼른 네가 만든 노래를 선곡해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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