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많음

영화 <파주>를 본 이들은 주로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먼저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고들 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여성의 시각을 바탕으로 수컷의 욕망을 계보학적으로 밟아 올라갔던 박찬옥 감독이 7년 만에 나타나 형부와 처제의 금기된 사랑을 다룬다! 그것도 '탐나는 도다'에서 싱그러우면서도 섹시한 매력을 잔뜩 뿜어냈던 서우가 출연한다! 커다란 눈망울을 물끄러미 뜬 서우가 "이 사람 사랑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는 듯 말하는 포스터까지! 영화가 극단적인 욕망의 소구점을 한껏 파고들어가 줄 줄 알았는데… "낚였다"며 허탈해 했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 안개처럼 그저 뿌옇다고도 했다. 인물 간의 감정 교차가 명확지 않았고, 오가는 대화조차 겹치지 않고 따로 논다는 푸념이었다. 영화평론가 남다은은 "<파주>를 치밀하고 노련하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영화가 모호함을 끌어안고 대면하며 세상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 <파주>의 힘이 있고, 나는 그 점에 위로를 받는다. 그 모호함이 영화 서사상의 모호함이 아니라 세상의 모호함을 대하는 이 영화의 태도라고 믿고 싶다"고 했다.

▲ ⓒ영화 '파주' 공식 홈페이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개봉한 지 10일이 지난 뒤 영화를 보게 된 나는 세간의 평가를 등에 업고 ‘적어도 낚이진 않겠군‘ 낙관했다. 안개와 같은 모호함이 얼마나 모호한 지 확인만 하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섰다. 하지만 뒤통수 한 번 제대로 맞았다. 영화는 모호하지 않았다. 남다은이 느낀 그 '모호함'이 적어도 불편한 시대를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개인의 불투명한 실존과 그 불투명함만큼이나 거칠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희뿌연 욕망 때문일 것, 이라고 섣불리 예단했던 나는 그저 먹먹해졌다. 모호함은커녕 적어도 내겐 우직하리만큼 직설적인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국엔 스멀스멀 불편해지기까지 했다. 감독이 직설적인 문체로 동원한 그 무언가를 모호함 속에 차라리 묻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배 중인 대학생 중식(이선균)은 운동권 선배가 감옥에 간 사이 그 선배의 아내와 섹스한다. 하지만 하필 섹스 직전에 TV로 봤던 운동권 대학생들의 구속 뉴스, 하필 그녀가 ‘평범한 불륜’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투쟁하다 구속된 선배의 아내라는 사실관계는 첫사랑에 대한 낭만도, 그녀의 육체를 향한 욕망도 죄의식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죗값은 그녀의 아이에게 부어진 뜨거운 물이란 형벌로 가시화한다. 도망치듯 파주로 온 중식은 한 여자와 결혼하지만 정작 섹스라는 욕망 추구엔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독주를 걸친 채 겨우 치러낸 섹스 끝에 그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용서해주세요”라며 흐느낀다. 이때 중식이 용서를 비는 대상은 개별적 낭만과 욕망을 거세했던 시대와 집단일 듯 싶다.

하지만 한 번 부당한 시대를 등졌던 그에게, 다가오는 시대들은 여전히 부당했다. 입시 공부를 할 사교육 시장이 없는 파주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 할 수도 없는 말, 아무 말이나 막하는" 공부방 교사가 된다. 경기도이면서도 수도권에서 왠지 소외된 듯한 파주란 땅에서, 역시나 소외된 채 떠밀려나온 이주노동자의 아이와 장애를 앓는 아이도 돌본다. 그러다 마침내 개발계획으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는 철거민들 사이로 묵묵히 들어가 대책위원장을 맡는다. 화염병으로 대변되는 ‘불법’ 투쟁에 대한 십자가까지 오롯이 진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철저하게 ‘용서’하지 않았다. 하룻밤 섹스 이후 단란한 부부관계의 일상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려하는 중식의 개별적 욕망은, 갑작스런 가스 폭발로 주검이 된 아내를 바라봐야하는 형벌로 또다시 못 박힌다. "이런 일 왜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라고 묻는 은모(서우)에게 "글쎄, 처음엔 멋져 보여 한 것 같고, 그 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이라서. 지금은 잘 모르겠네.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라고 답하는 중식에게 모순의 시대, 그리고 그 시대와 대척점에 선 집단의 욕망은 존재하지만 개인의 욕망은 설명할 수 없거나, 추구해선 안 되는 터부로 자리매김한다. 중식은 결국 사회적으로 혹은 집단의 도덕으로 강요된 책임감의 이면에서, 거세당한 개인의 욕망을 부여잡고 있는 일그러진 지식인을 표상하는 것 같다.

중식이 표상하는 대상은 낯이 익다. 홍상수 영화의 캐릭터들이 가진 격한 비루함이거나, <오래된 정원>의 현주(지진희)에게서 봤던 참기 힘든 고루함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다시 또 잊고 지낸 거 같아요. 제가 얼마나 미욱한 놈인지”라고 되뇌는 중식을 통해 삶을 끊임없이 성찰적으로 반추하는 지식인에게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을, 박찬옥은 넌지시 내비친다. 이 때문에 나는 박찬옥의 영점 조준이 중식이 아니라, 중식을 관찰하는 대상으로서의 은모에게 탄착돼 있지 않을까 싶다.

▲ ⓒ영화 '파주' 공식 홈페이지
영화를 보는 내내 은모는 그 이름만큼이나 모호했다. 시종일관 커다란 눈망울을 쭈뼛대고 입술을 달싹대면서도 명확한 말을 내뱉지 않는 은모의 표현법 때문일까, 싶었다.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졸업반, 스물세 살의 나이를 오가는 은모에게 지식인 중식의 묵직한 책임감은 8년의 성장 과정을 거쳐도 도통 이해되지 않는 버거움의 대상이다. 공부방 아이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중식의 반사회성이, 돈도 못 벌고 사랑조차 하지 않으면서 언니를 아내가 아니라 ‘노예’로 만드는 그 뻔뻔함이, 수배돼 쇠고랑을 차고도 자신의 대학 등록금부터 걱정해주는 그 ‘가식’이, 차가운 물대포를 맞고 들어와 곧 무너질 듯한 철거예정 건물의 외딴방에서 한숨 눈 붙이겠다며 눕는 그 우직함이, 은모에겐 견딜 수 없는 생소함이다. 이때 은모는 생소함을 포용할 수 있는 성숙함보단 의아함을 배척하며 자기 세계 속에 배타적으로 갇히길 원하는, 그런 나이의 아이에 불과했다. 은모가 스승의 날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중식을 놀리고, ‘노예’가 된 언니를 구할 돈을 벌기 위해 가출을 결심하고, 철창 너머 구속된 중식의 남루함을 본 직후 ‘당돌하게도’ 등록금을 인출해 인도로 떠나고, 철거 투쟁의 중심에 있던 중식을 보험사기로 고소하며 내내 중식의 절실한 세계에 포섭되길 거부하는 걸 보면서도 불편할 수 없었던 이유다.

은모가 표상하는 대상은 그럼에도 잡힐 듯 말 듯했다. 철거민들의 화염병과 용역 깡패들의 무차별 폭력, 욕설과 비명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마치 다른 세계를 지나듯 유유히 철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은모의 모습은 부유 그 자체였다. 의도치 않은 실수로 죽은 언니가 남긴(실제론 중식에게 남겼지만) 보험금 1억원을 쥐고 “이젠 부모님이 남긴 집 안 팔아도 되요”라고 말하는 은모의 미소도 생경했다. 하지만 집을 팔고 질곡의 땅 파주를 떠나는 은모가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과 교감의 눈빛을 주고받는 마지막 장면에까지 이르자, 은모라는 캐릭터로 환유된 그 무언가가 구체화했다. 그리고 은모의 부유와 생경함 뒤의 이면이 뻔히 보이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안의 치부를 봤기 때문에 애써 그 대상을 포착해내지 않고 있었음을 문득 깨닫게 됐다.

철거 현장을 유유히 걸어가던 은모가 표상하는 대상은 매일 용산을 무표정하게 지나치는 나, 그리고 너 아니었을까. 부모가 남긴 재산을 지키고 싶어하던 은모는 상속관계의 잣대 혹은 부모가 남긴 가치체계에서 끝내 해방되지 못한 우리 모습 아닐까. 재개발업자와 이익관계를 주고받는 은모는 뉴타운 아파트값에 목매는 또 다른 우리이진 않을까, 싶다. 영화는 또 지식인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과 공감하기 힘든 절실함에 대한 책임이 오롯이 지식인들에게만 있는 걸까, 라고 묻고 있는 듯도 하다. 은모의 나이가 스물셋, 즉 1987년생이란 사실이 우연이 아니라면 그 ‘우리’로 표상되는 모호한 대상이 87년 체제 이후 이 땅의 정치적 민주화 혜택을 고스란히 누리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허덕이고 있는 ‘상처받은 이 땅의 민중’으로 구체화하는 것 아닐까, 싶다.

거기까지 결론이 이르자 왠지 공허하면서도 씁쓸해졌다. 욕망의 계보학에 날카롭게 메스를 들이대며 일상을 정밀하게 해부하던 박찬옥이 어쩌다 이런 ‘시대와의 불화’라는 거대 서사에 동원됐을까, 싶어서다. 이 땅의 미욱함이 또다시 낭만과 욕망을 거세하고 시대와의 불화라는 획일적 거대 담론으로 모두를 집단화한 동원 체제로 길들이고 있진 않은가, 싶기도 하다. 무엇이 박찬옥을 여기까지 몰아왔는가, 라고 묻는다면 누가 여기서 자유로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차라리, 내 고답적 시선이 보고 싶은 것만 추려서 봤을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희뿌연 담배 연기만큼이나 한없이 착잡했던 건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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