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누구나 말할 수 있게 됐다. “뭐, 이런 걸 기자라고….” “이런 기사 나도 쓰겠다.” “기자? 나도 하겠네.” 옳은 말이다. 누구나 기사를 쓸 수 있고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 확실히 이제는 다른 세상이다. 신문에 밑줄 그어가며 탐독하던 시대는 지났다. 기자가 대중을 논평하면 대중들도 기자를 난도질하는 시대가 왔다. 가만 보면, 둘의 관계가 참으로 험악하기 짝이 없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걸까.

“뭐 이런 걸 기자라고…”

우선 기자라는 게 매우 어중간한 위치에 서 있는 직종임을 유념해야 한다. 통념상 전문직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그들은 미디어 종사자, 즉 중간에 있는 매개자일 따름이다. 철학자들은 개념을 창안하고 과학자들은 기능을 개발하고 예술가들은 감각을 창조하지만, 기자들은 대체 뭘 하는 존재인지 불분명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만들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기자들을 일종의 전문번역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그들은 개념과 감각 따위를 직접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쉬운 언어로 번역해 대중들에게 전달해주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못한다. 가상성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했던가. 다만 그들은 개념․감각과 비슷한 어떤 의미들을 만들어내기는 한다. 번역의 전달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부산물일 텐데, 미디어의 생명력과 사명감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런 까닭에 번역이란 (시쳇말로) 언제나-이미 반역적이다. 전문번역자인 기자들은 사실상 전문‘반’역자인 셈이다. 사실을 전달하는 과정이 순수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기자 개인과 편집진의 특수한 해석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번역을 넘어서는 반역이란 미디어가 자기 논리를 통해 사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만드는 존재들인 것이다.

나는 오늘날 기자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이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대중들은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미디어에 자기 욕구를 위임하는데, 그 위임은 언제 배반당할지 모르는 상태로 남게 된다. 사실, 대중의 권한 위임은 기자들이 ‘직필정론’이라면서 지배질서에 대한 반역을 언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칼보다 강하다는 기자의 펜이 지배질서를 공략하지 않고 대중 정서를 오역한다면, 등 돌리고 적대시하는 일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위임을 백지화하고 새로이 출수하는 게 수순이다. 오늘날 기자들이 글을 쓰면 대중은 평가하기를 주저치 않는다. 과감히 비공감 버튼을 클릭하거나 악플을 단다. 글이 마음에 안 들어도 묵묵히 열독하거나 별다른 항의 없이 신문을 바꿔야 했던 옛날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언론사와 기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뭐, 이런 걸 기자라고….”

물론 대중들의 기호와 선택이 전적으로 옳다는 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자에 대한 반감은 다수의 대중들이 스스로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 세대를 막론하고 탈정치화된 세태 속에서 다수가 선택하는 지면은 사실상 연예와 스포츠에 집중되어 있지 않은가. 문제는 찌라시 언론일수록 지배질서가 아니라 대중에게 반역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파파라치와 카더라의 향연에는, 욕망의 분출이 있을지언정 지배체계를 가로지르는 성찰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물론 깨달음이란 아주 묘한 것이어서 가끔은 가능하기도 하다).

“이런 기사 나도 쓰겠다”

여기까지가 기자에 대한 대중적 불신의 (상호)주체적 맥락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다. 기술에 의한 환경 변화가 그것이다. 전통적으로 대중은 말할 수 없었다. 민중적 봉기가 있지 않은 이상 그들은 직접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아껴왔다. 물론 이런 사실은 불과 몇 년 전까지에만 국한된다. 지금은 대중들 스스로가 미디어 보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중은 기자들의 반역적 행위(action)에 단순히 반응(reaction)만 하진 않는다. 기자가 기자 본연의 책무를 다하지 못할 때, 그들은 기자들이 수행하던 역할을 가로채기도 한다. 전문가들의 독점적 영역으로 여겨졌던 역할, 즉 사실을 다루고 지식을 생산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전문가와 반역자(즉, 기자)가 무기력에 빠졌을 때, 미네르바 같은 이가 나타나 우리 모두를 매료시켰던 일이 대표적인 경우다.

인터넷, 커뮤니티, 블로그, 1인 방송…. 기성 전문가 집단에 대한 만연한 반지성주의와 팽배한 불신감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해 활로를 찾은 듯하다. 이른바 집단 지능(collective intelligence)의 출현이다. 안톤 오노가 할리우드 액션인 것도 네티즌이 밝혀냈고,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는 촛불도 네티즌의 발의로 시작됐다. 그 이래로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는 언제나 익명의 대중이 있었다. 그들은 보편화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가지고 놀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심지어는 지식인들의 지적 사기를 밝혀내기도 한다.

뉴스를 보도하는 것도 더 이상 기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혼자 취재에 나서는 것보다 이들 집단 지능이 모의하여 역할을 분담하고 합력하는 쪽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ip주소를 추적하거나 문제적인 인물의 신원을 확인하는 등, 이들의 성과는 사회 전체의 새로운 활력소로 각광을 받을 정도다. (물론 사이버테러로 번질 위험 소지도 있기 하지만) 적어도 혼자 뛰는 기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움직이는 대중의 역량이 더 뛰어나다는 결론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나보다 똑똑하다.

기술이 발전하고 전문 지식에 대한 접근이 대중적으로 보편화됐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기자들이 본연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기자질’에 머무르면서 그 기자질은 대중 누구라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고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기자가 일반 대중과 다른 점은 단지 언론고시를 통과하고 그쪽 분야에서 약간의 실무경험과 경력을 쌓았다는 것 말고는 없다. 이런 사실쯤이야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대중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기사 나도 쓰겠다.”

나쁜 반역과 좋은 반역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디어는 책무를 소홀히 하다 못해 권력을 남용하고, 견디다 못한 대중들은 때마침 출현한 기술적 환경을 이용해 응전한다. 오늘날 현실적인 주체적․환경적 조건들이 기자와 대중의 전통적인 관계를 허물고 반목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좋다. 일단 집단지능의 경우에서처럼 대중이 자기 역량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내자. 그리고 기자의 지위가 점점 취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려주자.

그러나 대중의 집단‘지능’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가 지배질서를 반역하는 본연의 ‘지성’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하겠다. 집단지능이 (아직 현실적으로는) 기성 전문가들보다 똑똑한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될 수 없다. 나는 지금 단순히 그들이 똑똑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관건은 똑똑한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기자와 대중의 반목은 소모적인 권력 싸움 양상이다. 악플을 다는 대중들은 종전의 관료적인 미디어 권력에 도전하지만 거기에 그치는 게 전부다. 또한 적극적으로 1인 미디어를 운용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찌라시 언론과 다를 바 없이 종전의 (나쁜) 반역을 답습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들은 “기자? 나도 하겠네.”라고 항변할 뿐이다.

요컨대 문제는 정치의 축소 혹은 실종이다. 기자질에 대한 불만이 단순히 언론 권력을 평등하게 나눠 갖는 데 그쳐선 안 될 일이다. 오히려 권력을 요구하는 전도된 욕망이 정치 자체를 차단할 가능성마저 있기 때문이다. 정치란 무엇이냐.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는 공평하게 분배된 언론을 통해 작금의 지배 질서와 언어적 한계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대중들이 기자들에게 반역하는 건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과 똑같은 기자가 되려는 게 아니라면, 진정으로 약간의 욕심이 더 필요하다. 똑똑한 기자가 능사가 아닌 만큼, 똑똑한 대중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은 없다. 기왕이면 좋은 반역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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