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가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예고한 가운데 그 명단을 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장지연’, ‘안익태’의 명단을 넣겠다는 입장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유명한 항일논설로 유명한 장지연 선생. 그러나 그 이후 히로부미 추모시, 일왕 메이지의 천장절 기념시 등의 친일행적이 논란이 돼 왔다. 이미 학교일선에서도 유명한 사실이다. 안익태 선생 역시 애국가를 작곡했지만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때문에 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논란도 있어왔지 않았나. (이 글에서 ‘선생’이라 칭한 것은 그저 지금까지 받아왔던 교육의 산물 정도로 생각해주길….)

▲ 11월 6일자 한겨레 1면 기사

그러나 우리 사회 논란 키워드는 여전히 ‘박정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는 지난달 26일 “친일인명사전에 박 전 대통령을 제개해서는 안된다”며 게재금지 가처분을 신청하는 등 법적대응에 나서고 있다.

과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일’을 했을까 안했을까?

이 가운데 민족연구소는 5일(어제) 홈페이지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의 ‘혈서’ 기사가 실린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사본을 공개했다.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이 사회적 논란이 되자 증거를 들이민 셈이다. 이날 공개된 만주신문에는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을 지원하면서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지원서류와 동봉해 당시 군관 모집 담당자를 감격했다”고 쓰여 있다. 이정도면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 여부에 대한 논쟁이 일단락될 수 있을 듯하다. 속된 말로 친일행적에 대해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박정희’라는 인물이 친일을 ‘했다’, ‘안했다’가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이 친일을 맹세한 ‘혈서’ 공개로 뜨거웠던 어제(5일)였다. 그러나 조중동의 6일자(오늘) 신문지면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오히려 ‘혈서’ 이야기는 쏙 빼놓고 친일인명사전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노재현의 시시각각’ 칼럼을 통해 “‘입맛대로’ 친일 인명사전”이라고 비판했다.

“명단에 포함될 박전희 전 대통령의 경우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군에 배속돼 1944년 7월 만리장성 너머 열하성 반벽산의 보병 제8단에 배치됐다. 주적은 중국 팔로군이었다. 그는 부관으로서 작전명령을 전달하고 부대 깃발을 관리했다. 여러 자료·증언을 종합하면 실제 전투에는 참가한 적이 없다”<6일자 중앙일보 ‘노재현의 시시각각’ 칼럼 중>

▲ 11월 6일자 중앙일보 여론면 기사
이와 함께 칼럼에서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의 경계로 삼자는 게 친일사전의 취지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의 이데올로기 다툼과 정쟁에 이바지한 꼴이 되고 말았다”면서 “(이는)작업의 편향성, 자의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6일 <동아일보> 역시 ‘광화문에서’란 코너를 통해 박제균 영상뉴스팀장은 “8일 발간되는 친일인명사전에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고 박정희 대통령과 우국의 절창 시일야방성대곡을 남긴 위암 장지연 선생이 포함됐다고 한다”면서 “친일문제에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접근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또한 의도성은 모르겠으나 암스덴 MIT 석좌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은 박정희 시대에 수출 주도형 성장과 수입 대체형 공업화라는 두 가지 전략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큰 성공을 거뒀다. 수출 주도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했고, 수입 대체를 통해 기술을 축적했다”면서 “이 전략은 유효하다”고 박 전 대통령의 치적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30주년 조중동 기사는 어땠나?

지난 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30주년이었다. 당시 조중동은 앞 다퉈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다시보기’, ‘객관적 평가’ 등을 통해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26일 서거 30주년에 맞춰 ‘박정희, 우린 그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기사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시대나 권력에 따라 달라지면서 아직 객관적인 분석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올해 서거 30주기를 맞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과 평가를 하려는 학계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 지난달 10월 26일 동아일보 10면 기사
중앙일보 역시 26일자 ‘진보 학계도 박정희 다시 보기’ 기사를 통해 “진보 학계에서도 박정희 시대를 독재와 저항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지 않고 그 시대의 복합적 측면을 인정하는 움직임이 늘었다”면서 “(박정희 기념 단체들에선) 2017년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기해 그를 제대로 평가하자는 계획”이라고 실었다.

<조선일보>도 같은 날 이정현 한나라당 의원의 말을 빌려 “30년은 결국 한 세대가 지났다는 의미다. 온갖 이해관계를 벗어날 시간이 지난 만큼 이제부터 보다 객관적이고 제대로 된 ‘박정희 평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며 ‘객관적’ 평가를 요구했다.

이렇듯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30주년을 맞이해 그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조중동. 그러나 ‘혈서’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이 드러난 이 때, 조중동은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 ‘다시보기’는 없었다. 이를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서거 30주년을 기해 박 전 대통령의 온갖 치적을 전달하기에 바빴던 지난달 26일 조중동 기사들. 이들은 그저 ‘객관적 평가’가 필요하다는 말로 가장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우상화하기에 바빴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조중동에게 ‘박정희’는 우상이어야 하는 한 대상일 뿐이다. 지난 26일 <중앙일보> 8면 ‘인간 박정희의 두 얼굴-권력관리엔 냉혹, 서민에겐 따뜻’, 이 기사처럼.

▲ 지난달 10월 26일 중앙일보 8면 기사
국민들 마음속 부동의 1위 박정희, 그 뒤의 조중동

지난 27일자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보수적 성향의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우리는 왜 그를 잊지 못하는가’라는 칼럼을 실은바 있다.

박 교수에 따르면 “그의 통치가 끝난 지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그가 왜 부동의 1위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는지, 왜 불멸의 통치자로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있는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곱씹어 보아야 한다”면서 “지금이야말로 이 불가사의한 이유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실제 박 전 대통령은 온갖 설문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많은 부분 1위를 달리고 있기도 하다.

왜냐고? 이 답은 아마도 오늘자 조중동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국민들 마음속의 부동의 1위 대통령이 박정희일 수밖에 없는 이유. 아마 이런 사회현상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전부는 아닐 지어도 조중동의 이 같은 모순적인 태도가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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