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는 대부분 두 남녀가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거나 결혼하는 식으로 사랑의 사계에 있어 ‘봄’과 ‘여름’만 보여준다. 하지만 사랑에도 수명이 있는지라 불타오르던 사랑에도 권태기는 반드시 찾아온다. 사랑하던 남녀가 다투거나 이별할 수도 있는 사랑의 가을과 겨울이 있기 마련인데, 로맨틱 코미디는 사랑의 가을과 겨울은 배제하고 달콤한 봄과 여름만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슈퍼히어로 영화도 로맨틱 코미디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악에게 위협당하는 영웅의 화려한 활약을 집중적으로 묘사하지, 화려함 뒤에 감춰진 공허함이나 인간적인 절망을 배제하기 쉽다. 하지만 ‘로건’은 달랐다. 이전 시리즈에서 영웅의 봄과 여름을 맘껏 뽐냈다면 ‘로건’은 영웅의 가을과 겨울을 변주된 서부영화 방식으로 보여준다.

영화 <로건> 스틸 이미지

과거로 돌아가면서까지 세상을 구한 영웅 울버린의 모습은 영화 초반부에서 좀처럼 찾기 힘들다. 힐링 팩터는 예전 같지 않고, 알코올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박탈감과 후회에 찌들어 살던 로건(울버린의 본명)이 이전 모습을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하는 계기는 어린 소녀 로라(다프네 킨 분)를 무뢰한들의 손아귀로부터 보호하게 되면서부터다. 소녀는 절망감에 찌들어 사는 퇴물 히어로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만든다.

사실 이런 테마는 새로운 테마는 아니다. 암으로 타계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총잡이가 사랑하는 여성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서부영화의 공식을 언급한 바 있다. ‘로건’은 이런 서부영화의 공식을 영리하게 변주할 줄 안다.

총잡이가 사랑하는 여성으로 인해 안식을 얻고 총잡이의 호전성을 봉인하는 서부영화의 고전적인 코드를 ‘로건’은 어린 소녀로 인해 잃어버린 영웅의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방식으로 변주한다. 서부영화에서 사랑하는 여인은 총잡이의 총을 봉인하는 촉매제지만, ‘로건’의 로라는 서부영화와는 반대로 쇠락한 영웅의 영웅성을 되찾게 만들어준다. 약자를 보호할 줄 알고, 악을 처단하는 영웅성 말이다.

영화 <로건> 스틸 이미지

한물 간 영웅이 한 명의 여성으로 말미암아 영웅성을 회복한다는 코드 외에도 ‘로건’은 서부영화 가운데 ‘셰인’에 빚진다. ‘셰인’의 대사를 보자. “살인을 저지른 뒤 살 수 없어. 그건 낙인이야. 돌이킬 수 없어.”

셰인은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지른 인간 도살자가 아니었다. 악당을 응징하는 정의의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셰인은 악당을 살해한 피에 물든 손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이 대사 가운데서 절절하게 녹아든다. 악을 응징한 다음에 소년과 같이 있어주는 게 아니라 소년의 곁을 떠난다. 로건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돌연변이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몇 십, 몇 백 명의 악을 응징했다고 해도 로건에게는 셰인의 대사처럼 ‘낙인’이 찍혔다. 죄의식, 죄책감이라는 낙인 말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어도 힐링 팩터 때문에 생을 정리하지 못하는 로건의 죄의식을 영화는 서부극 ‘셰인’의 대사를 통해 대신하고 있다. 힐링 팩터가 있음에도 로건의 몸 여기저기가 흉터로 도배되었다는 점은 로건의 심리 또한 그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죄책감이라는 상흔에 괴로워하고 자책감에 찌들어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로건> 스틸 이미지

마지막으로 하나 더, ‘투모로우’의 후반부는 빙하로 뒤덮인 미국 본토를 감당하지 못하고 미국민이 멕시코에 빚진다. 평소 멕시코를 ‘이류 국가’, 혹은 불법 체류자의 원류로 얕잡아보던 미국인의 정서를 독일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는 ‘투모로우’를 통해 비틀고 있었다.

‘로건’ 또한 마찬가지다. 악의 축을 미국으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의인 혹은 희생양을 멕시코인으로 설정한 ‘로건’의 서사는 멕시코산 제품에 장벽 관세를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정책과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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