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박양지 기자]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에 거주하는 박모(58, 남) 씨는 2월 28일 아침, 동네 마을회관에서 하는 안내방송을 들었다. ‘내일은 98주년 3.1절이니 국경일을 맞아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자’는 내용이었다.

박 씨는 “해마다 국경일이면 국기를 달았다. 태극기를 빳빳하게 잘 다려서 국기함에 보관한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는데 올해는 영 찝찝하다”면서 “태극기 달라는 소리가 이렇게 거북하게 들리기는 또 처음”이라고 씁쓸해했다.

가정주부 김모(56, 여) 씨도 반응은 비슷했다. 그는 기자의 물음에 “정치 시위에 신성한 태극기를 도구로 쓰는 자체가 태극기의 가치 훼손 아니냐”고 잘라 말했다.

울산 언양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정치적 목적을 지닌 탄핵 반대 집회에 태극기가 사용되며 해당 집회가 일명 ‘태극기 집회’, ‘태극기 애국집회’ 등으로 불리자, 태극기 게양 자체를 꺼리는 시민도 늘고 있는 상황. 3.1절은 1919년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국민이 주도했던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국경일이다. 이 같은 국경일을 기념하기 위해 지자체마다 3.1절 기념 만세운동 재현 등 다양한 행사를 예정하고 시민의 국기 게양을 독려하고 있다.

울산에서 심리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모(40, 여) 씨는 “태극기는 우리 민족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독립투사와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그런 태극기를 정치적으로, 보수단체의 탄핵반대 시위에 사용해 버리고 ‘태극기 집회’라는 말까지 붙였다. 이제 ‘태극기를 게양하라’는 말이 거북하게 안 들릴 수가 없게 됐다”고 개탄했다.

직장인 박모(26, 남) 씨는 “요즘 태극기 집회로 난리가 나기 전까지는 ‘태극기’하면 김연아나 태극전사처럼 국가대표 선수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 선수들이 메달을 걸고 태극기를 바라보는 장면은 다시 봐도 뭉클하다. 예전 김연아 선수 올림픽 영상은 두고두고 다시 봤을 정도”라며 “그렇게 나라를 위해서 중요한 날에 귀하게 쓰여야 되고, 그만한 상징성을 가진 게 태극기인데 요즘 태극기는 뭘 상징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이 같은 시민사회의 분위기로 인해 지자체도 난감함을 표하고 있다. 3.1절을 앞두고 열기로 했던 태극기 배부 행사나 퍼레이드 등이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축소 및 취소되는 사례도 발생했다.

또 태극기 달기 캠페인이 ‘친박 집회’로 오인되는 등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도 연출됐다. 순국선열의 공로를 기억해야 할 3.1절, ‘대한독립만세’를 상징해야 할 태극기가 오해와 갈등, 정치적 목적으로 얼룩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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