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이 끝났는가? 작년 이 맘 때 쯤 미국의 투자은행 베어스턴스가 몰락하자 한국의 좌파들은 뭔가를 해 보려는 시늉을 했다. 영국에서 맑스의 <자본론>이 품귀 현상을 빚는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쌍차 투쟁에서 패배하고 된서리를 맞아서인가, 아니면 공황이 끝나서인가? 한국의 좌파들은 또 다시 조용한 듯하다. 작년의 그 자그마하던 몸짓마저 푸르른 가을 하늘 만큼이나 멀리 멀리 머리 위로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가을 햇살은 따갑고 하늘은 푸르지만 가을 하늘 밑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지옥이다.

최근 나영이 사건이든, 제주도에서 졸지에 사라져버린 남자 고등학생이든 영화 <추격자>처럼 세상이 잔인무도한 지옥으로 변하고 있다. 고등학교에서는 요즘 '빵 셔틀'이라는 놀이 아닌 참담한 이지메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른바 학생들이 귀족, 평민, 천민으로 나뉘어져 귀족을 자처하는 날라리들이 범생이거나 순진탱이인 천민 학생에게 빵 배달에 돈 배달에 온갖 것들을 주문한다. 고등학생들도 이젠 눈치를 챈 모양이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서 한국 사회의 계급 격차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 아예 내 놓고 강부자 정권을 자처하면서 부자들에게 올인하는 계급사회의 모습을 학교의 아이들도 몸으로 느끼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애꿎게도 얌전한 아이들이 학대당하는 것이지만, 아이들 사이에 귀족과 천민들이 존재하는 학교는 또한 얼마나 지옥일 것인가!

▲ 임태희 노동부 장관이 12일 오전 '상견례' 차 민주노총을 방문해 임성규 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오마이뉴스 이경태

경제고 교육이고 사회고 '기 흐름'이 완전히 폐색된 세상에 살다 보니 한국의 좌파들이라고 해도 그런 지옥을 감내하고 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한국 사회라는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파김치가 되었지만 그 몸 구석구석에서 그 나마라도 숨을 쉬고 있는 세포 안에서 꾸물꾸물 거리며 소주 한 잔에 위안을 받고 살아간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나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체념 하자니 그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권이 작년 촛불에 대한 보복을 전방위적으로 하고 있다. 노조 죽이기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이자 한국노총도 발끈하고 나섰다. 하지만 뒤가 켕긴다. 민주노총 위원장도 새로 임명된 노동부 장관 첫 인상이 좋다고 했단다. 노동부 장관이 인간인 줄 아는 모양이다. 노동부 장관은 이명박 정권의 국가 장치, 그것도 노동과 연관된 중요한 국가장치일 뿐이다. 그런 국가 장치를 이명박 정권이 왜 마련했을까? 아무리 무뇌정권이라고 하지만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 앞에서는 머리가 비상한 정권이 이명박 정권이다.

굳이 김수행 교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직 진짜 거품은 터지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늘 지뢰를 안고 살아가는 자폭형체제이고 그 안에 둥지를 튼 국가는 자살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제시된 결론에 따라 충실하게 운동을 해 왔다. 자폭형 체제 앞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운동, 생존권을 보장하는 운동을 충실하게 해 온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다른 유산에 대해서는 한국의 좌파들이 둔감한 듯하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완성도가 높은 유산이지만 마르크스의 유물론적인 역사이론은 미완성 프로젝트다.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에 맞선 투쟁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저임금 직업이 넘쳐나는 일본의 1980년대로 회귀하는 마당에 이제는, ‘누가 노동자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존의 관성적인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청사진을 한국의 좌파들이 제시하고 노동운동에 제안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충실한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다른 유산에 충실한 노동운동 ․ 계급 운동을 새롭게 실천해야 한다. 민주노총이 생산자계급의 코뮨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전국적으로 생산자계급들의 코뮨이 건설되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국가에 완벽하게 포섭되고 말 것이다.

한 번 상상해 보자. 또 다른 나라, 또 다른 국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들의 국가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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