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 <언더 파이어>는 내전을 겪고 있는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니카라과에서 한 서방의 사진기자가 겪는 실화에 가까운 모험담을 그린 작품이다. 위험천만한 내전의 현장에서 주인공은 도무지 종적을 찾을 길 없는 전설 속 인물과도 같은 반군 지도자 ‘라파엘’을 만날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산 넘고 물 건너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이국땅 어느 심심산중에 들어서 마침내 반군 지도자를 대면하게 된 주인공. 그런데 그는 말이 없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신이었던 것이다. 반군들은 주인공에게 이렇게 청한다. “사진을 찍어주시오. 살아 있는 것처럼.” 지긋지긋한 가난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부패한 꼭두각시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당신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사진기자가 아니오. 며칠만 참으면 혁명은 완성된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 혁명의 지도자 ‘라파엘’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다오. 단 며칠만 살아 있게 만들어다오.

▲ 테러리즘의 문화 (노엄 촘스키, 2002)
혁명은 성공했다. 1979년 니카라과의 반군세력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rente Sandin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은 오랫동안 미국의 총애를 받아온 소모사의 독재 정권을 마침내 무너뜨렸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즉각 산디니스타를 상대로 비밀 전쟁을 벌이기 위해 소모사 정권하에서 정부군에 소속됐던 전직 장교들을 중심으로 반혁명군인 콘트라를 조직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과테말라, 이스라엘을 동원해 비밀리에 콘트라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란에 무기를 몰래 내다 판 수익금의 일부가 콘트라를 지원하는 데 쓰였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던 1986년 10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콘트라에 무기를 수송하던 수송기 한 대가 니카라과의 포격에 격추되고 미국인 조종사가 생포된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다음 달인 11월 19일 기자간담회에서 (미국의 숙적으로 간주되는) 이란으로 무기가 수송되고 있으며 그 수익금이 콘트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폭로에 관해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거짓말을 했다. “이란으로 보낸 것은 대전차 미사일 몇 대뿐이다(2천기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제3자들에 의한 무기수송을 묵과한 적이 없다. 그 무기들을 인질들과 교환한 바 없다, 그 작전의 목적은 이란 온건파와의 대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목적은 콘트라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1986년의 스캔들은 미국이 힘에 의한 지배에 몰두하고 있으며, 폭력과 무법성이야말로 기만적인 수사로 근근이 위장해왔던 미국 정치 엘리트들의 참모습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촘스키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초일류 강대국인 미국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중남미 각국에서 벌여온 야만적인 폭력과 압제를 철저하게 정당화하는 교리를 전파했다고 말한다. 거북한 사실들을 가릴 필요가 있을 때 유용한 ‘방침의 변화’ 교리는 미국이 지난 역사의 교훈을 깡그리 무시하고 고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출발점으로 갈아타는 데 보기 좋게 성공해온 사실로 입증됐다.

콘트라를 동원한 미국발 국제테러리즘의 잔혹한 학살행위는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국가에 비해 니카라과에서는 그나마 덜 했는데도, 이란-콘트라 사건이 불거진 1986년까지 1만 1천 명에 이르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잔학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까닭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미국의 ‘선량한 의도’ 교리 때문이다. 1986년 6월 국제사법재판소가 미국의 니카라과 침공을 “불법적인 무력행사”이며 조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결정했을 때도 미국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986년의 스캔들이 폭로된 것과 같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미국은 그 어떤 중요한 사항도 누설되거나 알려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피해 방지’ 계획을 실행한다. 이 역시 역사적 기억상실과 터널시야(tunnel vision)이라는 기술에 의해 아주 용이하게 달성된다고 촘스키는 지적한다. 예컨대 미국이 나카라과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는 주장이 피해방지의 결정적 원리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지닌 의미를 사전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으로 나눠 이해해보려 한 촘스키의 시도는 주목에 값한다.

▲ 노엄 촘스키(1928년 12월 7일~)
사전적 의미와 달리 기술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미국 투자자들의 이익에 부응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정치체제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해석을 따르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워싱턴 특파원 알렉스 브러머의 다음과 같은 반응이 하등 놀라울 것도 없다. 브러머는 레이건 행정부가 1986년 8월 5일에 내놓은 급조된 ‘평화계획’은 중앙아메리카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조롱거리가 되었음에도, 레이건의 제안이 “미국 언론에서 그처럼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세계 다른 곳에서는 순전히 훼방꾼 역할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레이건 계획이 미국에서 그처럼 좋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정말 경악스럽다.”

미국의 국제테러리즘을 치부까지 발가벗기는 이 책에서 정부만큼이나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유언론’을 자처하는 미국의 언론이다. 미국처럼 매우 순응적인 지적 문화 속에서 국가는 주도권을 행사하고, 언론을 포함한 지식인사회는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지시에 따르고 복종한다. 굴종적인 언론의 자기기만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명쾌하게 정리된다.

“부정의와 착취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진다고 했을 때, 가령 온두라스에서 굶어죽는 사람들과 과테말라에서 군대가 운영하는 집단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 수가 줄어든다면 물론 기쁜 일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적어도 엘살바도르에 상존하는 고문과 학살의 공포로부터 사람들이 언젠가는 해방되길 바란다. 하지만 부와 특권이 보장되고 미국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는 한, 이런 것들이 문제로 제기되는 일은 확실히 드물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미국의 뉴스 보도와 논의의 틀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앞으로 어떤 길을 밟아갈 것인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미국 정부의 조치들이 상당한 국민적 반대에 직면하자 레이건 행정부는 고전적인 수법을 써먹었다. 대중이 겁을 집어먹게 하는 것이다. 당신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는다는 뻔한 거짓말은 어떤 경우에도 먹혀들게 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이 반대하는 정책을 끝내는 ‘필요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나치의 지도자들에게도 대중의 열의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국민의 소극적인 순응의 태도, 무관심, 다른 곳을 쳐다보며 개인적 이익에 몰두하고, 힘과 위대성의 상징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코 눈앞에서 모습을 감춘 적이 없는 ‘채찍’에 의해 강화되었다. 촘스키가 말하는 ‘전체주의의 정신상태’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보수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형태의 우려할만한 ‘우경화’가 주류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 엘리트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우리 사회의 지적 풍토가 좀처럼 납득되지 않던 차에, 촘스키가 이 책에서 펼쳐 보인 논지를 따라가다 보니 어째서 저널리스트들이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질문하기를 회피해가면서 국가권력이 선전하는 이데올로기를 선험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느 대학 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촘스키의 분석이 노정하는 사회과학적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는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책의 분석이 구체적인 사례 중심의 저널리즘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데서 실은 더 중요한 시사점을 얻게 된다. 뉴스는 역사를 해석하고 기록하는 또 다른 그릇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촘스키가 펼쳐 보인 것처럼 훗날 누군가가 그 기록을 역사 해석의 근거로 삼고자 한다면, 점증하는 국가 권력의 위세 앞에 굴종하는 이 시대 저널리즘을 후대의 역사가들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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