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질서있는 퇴진론’이 다시 화제인 모양이다. 보수언론이 연일 지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를 언급한 데 이어 정치권까지 한 마디씩 거들면서 뜨거운 감자가 된 셈이다.

22일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YTN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언론 보도를 보니 대통령은 현재 하야나 자진사퇴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면서도 “촛불과 태극기 집회가 점점 가열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돼서는 어떻게 가도 국론분열과 국정안정에 도움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질서있는 퇴진론’의 당위를 재차 언급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21일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도 내놓은 바 있다. 요약하자면 탄핵이 인용되기 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를 선택하고 차기 대선주자들은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면해주거나 일부 줄여주자는 것이다.

20일치 중앙일보 지면에는 이를 매우 분명하게 주장하는 칼럼이 실려 있다. 중앙일보 강찬호 논설위원은 이 글에서 “박 대통령의 2월 내 하야와 60일 내 대선 실시를 전제로 탄핵을 포함한 모든 사법조치 중단에 합의해야 한다”면서 “박 대통령이 끝끝내 탄핵을 당해 청와대에서 쫓겨나고, 수갑 찬 죄수복 차림으로 법정에 선다면 이들(박 대통령 지지자)은 비수에 찔린 듯한 아픔 속에 야당에 대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른정당을 제외한 야권은 이런 주장에 대해 그리 긍정적인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바른정당 정병국 대표는 22일 YTN라디오와의 전화 연결에서 “정치적 해결이 (질서있는 퇴진론으로) 그렇게 연결돼선 안 된다”면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이뤄져야 하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사법적 결과는 지켜봐야 한다”고 발언했다.

주로 보수정당을 통해 이런 주장이 나오는 배경에는 이른바 ‘촛불 시민’과 ‘태극기 시민’이 정면충돌하는 양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선의’와 함께, 최순실 등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가 보수 정치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정파적 판단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16차 변론에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특히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될 가능성이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상태에서 이대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아닌가 싶은 대목도 있다. 일례로 박근혜 대통령과 명확한 단절을 선언하고 살림을 따로 차린 바른정당의 대권주자들은 나름대로의 차별화에 나서고 있음에도 여론조사 등에서 그야말로 악전고투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 인용 결정을 하는 것보다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는 게 바람직한 그림임은 두 말할 것이 없다. 문제는 이 반대급부로 대통령에 사법적 배려를 하는 것에는 동의할 국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미르 K스포츠재단도 선의” 발언이 정국을 잠시나마 뒤흔든 이유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야권 지지층 일부는 지금까지 중도확장적 선거 전략을 보여온 안희정 지사가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법적 배려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발언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흐름은 안희정 지사 발언이 일으킨 부정적 효과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만일 박근혜 대통령이 오직 ‘대통령직’을 수행한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사법적 책임을 전부 짊어지지 않게 된다면 국민이 느낄 상대적 박탈감은 어떠한 형태로든 파국적으로 분출될 것이다. ‘질서있는 퇴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양측의 극단적 대결구도를 희석하자는 차원이라고 설명하지만, 그것이 실제 실행될 경우 더 큰 혼란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른바 ‘촛불시위’의 규모는 커질 것이고, 독이 오를 대로 올라있는 자칭 ‘태극기 집회’도 실력행사에 나설 것이라는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 대응이 ‘질서있는 퇴진’과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이런 시나리오를 검토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22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16차 변론에 대통령측 대리인으로 출석한 김평우 변호사는 1시간 30분에 걸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논리가 담긴 주장을 설파했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하는 과정이 잘못됐고, 미르재단 및 K스포츠재단의 돈은 그대로 있어 대통령에 뇌물죄를 적용하는 근거가 될 수 없으며, 헌법재판소는 편파적으로 국회 측 편을 들면서 탄핵심판을 진행하고 있고 8인 체제도 위헌이라는 등의 내용이다.

이 주장을 하는 중에 “탄핵이 인용시 내란이 날 것”, “강일원 재판관은 국회수석대변인”이라는 표현도 했다. 김평우 변호사가 이런 식의 변론을 하는 동안 헌법재판소 측은 수차례에 걸쳐 언행에 주의하라는 경고를 해야 했다.

18일 오후 서울 광장 인근에서 열린 제13차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에서 대통령 측 법률대리인인 김평우 변호사(오른쪽)가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서석구 변호사. (연합뉴스)

또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은 이날 정세균 국회의장과 김무성 나경원 황영철 유승민 정진석 우상호 박지원 의원을 비롯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박한철 전 헌재소장, 이외 수 명의 헌법학자 등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앞서의 막무가내 변론과 묶어 보면 탄핵심판을 지연시키려는 의도가 매우 명확한 행위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검의 대면조사 요청과 청와대 압수수색도 거부하면서 오로지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대통령이 이런 ‘꼼수’에 가까운 대응으로 일관하는 상태에서는 하야와 사법적 책임의 축소라는 ‘딜’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일각에서 질서있는 퇴진론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은 탄핵심판 지연의 또 다른 핑곗거리를 만들면서 동시에 이 사태의 책임을 집권 가능성이 큰 야당에 지우기 위한 어떤 술수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효과도 기대할 수 없고 정치적으로도 불성실한 이런 주장을 정치권이 진지하게 다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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