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비리와 군가산점

1997년 대통령선거 이후 새로운 유행어가 생겨다. ‘병역비리’ 당시 유력했던 여당의 대통령 후보를 떨어뜨린 이 무시무시한 단어는 잊혀질만 하면 등장하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정치권과 재계의 유력인사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락 내리락 하고, 인기 연예인이 사죄의 눈물을 흘리며 자진 입대하고, 유명한 스포츠 선수들이 감옥으로 향해도 ‘병역비리’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비리를 저지를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은 뉴스를 보면서 그저 짜증나고 허탈할 뿐이다. 서민들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병무청장이 병역비리 근절을 위한 묘안을 국정감사자리에서 내놓으셨다. ‘군가산점제’!

병역비리가 가산점이 없어서 일어나나? 그렇다면 군가산점이 존재했던 시기에는 병역비리가 없었나? 병역비리가 왜 일어나는지, 군가산점이 실직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병무청은 생각이나 해봤을까? 병무청의 빈곤한 상상력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오죽했으면 그 보수적이라는 국방위소속 한나라당 국회의원 중에서도 신중론이 나오고 “여성과 장애인에게 차별의 소지”(김동성 의원)나 “군가산점은 헌법이 규정한 평등권이나 공무담임권에 위배된다는 헌재의 결정”(유승민 의원) 등 반대 의사가 나왔을까.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최근 일어난 병역비리 사건 때문에 병무청이 국정감사자리에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아무 준비도 생각도 없이 그냥 쉽게 떠오르는 방안이랍시고 군사가산점제도를 들고 나온 것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 박종달 병무청장ⓒ병무청

동전의 양면, 징병제와 병역비리

징병제가 존재하는 곳에 병역비리는 존재했다. 근대적인 국민개병제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징병제에서도, 혹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징병률 100%달성은 권력자들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징병제와 병역비리, 둘은 공생관계는 아닐지라도 뗄레야 뗄 수 없는 끈끈한 관계인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의무지 징병제는 국가가 사법적인 처벌을 무기삼아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제도다. 진정 자발성에 기초한 의무였다면 특별한 보상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강제적인 의무였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필요했다. 서구사회에서는 투표권 등의 확장을 통한 시민권의 확대가 징병제 참여의 보상이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시민사회의 형성 이전에 일제에 의해 징병제가 실시됐고, 해방 후에도 시민권 획득과는 무관하게 징병제도가 도입되고 전쟁을 겪으며 한 층 강화되었다.

보상이 없는 한국에서 병역비리를 줄이기 위한 방편은 폭압적인 처벌과 탄압이었다. 무차별적인 강제입영은 공포를 토대로 이뤄졌다. 한국전쟁 중에는 병력자원을 북한에게 넘길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 아무런 준비도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죽음의 행렬이라 불린 국민방위군을 조직했고, 징병률 100%를 꿈꿨던 박정희의 유신시대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많이 모이는 집회장소나 심지어 결혼식장에까지 쫓아가 신랑을 강제입영시키기도 하였다. 결국 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는데, 전쟁 중 강제 입영당한 국민방위군은 총 한 번 안쏴보고 수 만명의 사람을 얼려죽이고 굶겨죽였고, 70년대 강제적인 입영정책으로 군대로 끌려간 여호와의 증인들 중에서도 신념을 지키는 대가로 구타에 의해 사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병무청이 호들갑 떠는 것과는 별개로 병역비리는 징병제의 역사와 함께 성장해왔고, 어떠한 정치적인 보상과 금전적인 보상도, 혹은 강압적인 처벌과 집행도 입영률 100%를 달성하지 못했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결국 강제성에 기반한 징병제가 가지는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병무청의 병역비리 관련 대책은 언발에 오줌누기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정부의 치졸한 꼼수

병역이행자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병역비리를 줄이고 징병제를 원활히 운영하는데 해결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적절한 보상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군 의무복무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는지, 혹은 여성들이나 장애인들 병역거부자들과 같은 군복무에 있어서 사회적 정치적 소수자들(권력이나 금전에 의존하는 병역기피자들은 숫자상으로 소수이지만 정치적인 의미에서 ‘소수자’라 불릴 수는 없다)에 비해 어떤 혜택을 누리는지 면밀히 파악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보상 방법을 논의하되, 그 보상이 피해 입은 것에 대한 정확한 보상인지, 또 그 보상으로 인해 다른 사회적인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병무청이 보상제도라고 들고 나온 군가산점은 사실은 군복무 남성들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가로막고 여성과 장애인처럼 군대로부터 배재 당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아주 나쁜 제도다. 국가가 치졸한 꼼수로서 남성들을 홀리고 있는 건데, 의무복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려면 군복무를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이루어져한다. 하지만 군가산점제도는 공무원 시험이나 공공부문 채용시험을 준비하는 일부 남성들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간다. 전시효과가 커질 수록 실질적인 보상은 줄어들게 된다. 일부 남성의 혜택을 위해 더 많은 남성의 보상은 수면 아래로 잠수해버리고 여성과 장애인은 차별이라는 벽에 가로막히게 된다.

병무청을 비롯한 국가권력이 자꾸 군가산점제를 들먹이는 이유는 손안대고 코풀기 쉬운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군의무복부자들에게 실질적인 보상만큼 중요한 것이 정서적, 정신적인 보상인데, 이들 보상의 주체는 당연히도 의무를 지운 국가가 담당해야한다. 군가산점이라는 상징성 짙은 의제를 사회에 내던짐으로써 위에 말했듯이 실질적인 보상에 대한 논의는 물타기를 해서 국가재정이 절약되고, 정신적인 보상에 있어서도 보상심리에 대한 화살을 엄한 곳-여성에게 돌리면서 국가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더군다나 병역문제에 있어서 뒤가 구린 높으신 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예비역 남성들의 화살을 여성들에게 돌릴 수 있으니 얼마나 효과적인 제도겠는가.

▲ 징병검사를 참관 중인 이상희 국방장관(가운데)ⓒ병무청

올바른 보상이 되려면

올바른 보상이 되기 위해서는 복무기간 발생하는 금전적, 시공간적인 손해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대 후에 이루어지는 보상은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군복무 당시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제일 좋다. 한참 일하거나 공부할 나이에 밖에서 일당으로 버는 수준의 임금을 받고 사회와 단절되어 다양한 경험을 거세당한 채 시간을 보내야하는 일이 기꺼울 청춘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군 복무 남성들에게 그나마 적절한 보상의 내용은 군대에서 희생한 2년 내외의 시간을 그 당시에 최대한 보전해 주는 것이다. 일당 수준의 임금(그나마도 병무청이나 국방부의 무관심속에서 평화운동가들과 병역거부자들의 노력으로 인상된)에서 정말 ‘임금’이라 부를 수 있을 수준으로 인상해줘야 한다. 스무살 넘은 청년들이 휴가 나와서 부모님한테 용돈 타서 다니지는 않게 해야 된다는 말이다.

이 요구에 대해 국방부나 병무청은 현실적인 재정의 문제를 핑계로 들 것이다. 한국 전쟁 후 현재의 60만대군의 규모를 갖춘 후에 해마다 천문학적으로 국방비가 오르는데 반해서 사병들의 월급은 대체 얼마가 올랐는지를 비교해보면 이 핑계가 얼마나 궁색한지 알 수 있다. 이지스 함이나 각종 대량살상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수십조를 선뜻 쓰면서 사병 월급 콩알만큼 올라가는데 대체 몇 년의 세월이 걸리는지, 오히려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또한 국가가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제대자들의 보상 심리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비역들의 보상심리는 일정정도 군생활자체에서 오는 상실감 보다는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서 분출되는 경우가 많다. 즉 모두가 피해보고 희생하는 부분에 대한 심리이기 보다는 나는 희생했는데 누군가는 그 희생을 함께 책임지지 않은 상황에 대한 분노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분노를 군가산점제도는 여성와 장애인 등 징병제도에서의 또 다른 약자에게 돌리고 있는데, 이는 예비역들의 분노를 아주 일시적으로만 해소할 수 있을 뿐이다. 군복무에 있어서 평등성을 확보하는 것이 예비역들의 보상심리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징집 절차의 투명성을 확보하여 돈과 권력을 무기삼아 병역비리를 일삼는 특권계층을 없애는 것이 애먼 여성과 장애인을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성과를 낼 것이다.

이 모든 보상의 노력은 당연히 국가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노력은 한 번도 뜯어 고치지 않은 한국 징병제도를 대대적인 손질을 통해 구조와 운영, 사병들의 생활과 인권까지 두루두루 합리적인 군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가고 싶은 군대는 불가능하겠지만, 덜 가기 싫은 군대를 만드는 게 병역비리를 줄이는 가장 더디고 정확한 지름길이다.

하지만 현재 병무청과 국방부의 수준을 감안 했을 때, 안타깝게도 너무 가혹한 요구인 것 같다. 많은 기대를 처음부터 걸지 않는다. 그냥 군가산점 운운하면서 어설픈 꼼수로 위기를 모면할 생각하지 말고, 사병들을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 이전에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볼 수 있다면, 인간으로서 대우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다면 첫걸음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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