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충남지사의 ‘선의’ 발언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의 입씨름으로 번지고 있다. 서로 뜬구름 잡는 말을 주고받고 있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잘 뜯어보면 이 입씨름은 결국 ‘정치관’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치란 무엇이며 그것으로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는지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안희정 지사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실정에 대해 “(그들 주장대로) 선의였다고 하더라도 문제”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데 대한 문재인 전 대표의 반응은 “분노가 실려 있지 않아 문제”라는 거였다. 세상사에 분노를 해야 불의를 바로잡을 수 있고, 촛불시위 역시 이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발화는 안희정 지사의 주장에 대한 반론격이지만 내용으로도 그런가는 의문이다. 안희정 지사가 분노하지 말자고 말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희정 지사는 또 문재인 전 대표의 진단(?)이 맞다고 한다. 자기는 분노를 일부러 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희정 지사는 “지도자의 분노는 피바람을 일으킨다”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를 에둘러 언급하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21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안희정 지사의 주장에 대해 “지금 우리 분노는 사람에 대한 증오가 아니다”, “국민들은 적폐청산, 국가대개혁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강력한 의지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기득권 세력과 적절히 손잡고 타협하는 방식으로는 어렵다”고도 했다. 안희정 지사가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기득권 세력과 적절히 손잡겠다”고 한 건 아니기 때문에 이 발언은 대연정 구상 등 ‘중도 확장 전략’에 견제구를 날린 걸로 풀이된다.

어쨌든 잘 이해되지 않는 이 문답의 화룡점정은 안희정 지사가 JTBC 프로그램에 출연해 손석희 사장과 대담을 한 내용이다. 안희정 지사는 문제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고는 21세기, 통섭, 지성사, 객관적 진리 등의 철학적 용어를 동원해 장시간에 걸쳐 특유의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SNS 등 인터넷상의 반응은 부정적 의미로 뜨거웠다. “개똥철학을 설파하는 집요한 운동권 선배 같았다”는 반응이 핵심을 찌른다.

야권의 유력 대선후보자인 안희정 충남지사가 20일 대전 유성구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민주당 2017년도 전국여성위원회 연수에 참가해 큰 웃음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안희정 지사의 주장을 본인이 언급한 ‘선의’로 해석해본다면 이런 이야기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은 대개, 말하자면 ‘저항의 언어’를 사용한다. 단순하게 보아서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저항은 ‘자신의 요구’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 요구를 내세우기 위해 세상만사의 여러 한계를 모두 감안할 필요는 없다.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의 문제제기 방식을 떠올리면 된다. 이런 문제제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그렇기에 또한 소중하다.

그런데 예를 들자면 관료의 경우 이런 ‘저항의 언어’에 대해 이런 저런 한계와 현실적 문제를 언급하며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논리는 “지금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여러 절차를 감안하면 오랜 시일이 걸리며, 이를 둘러싼 소송이 제기될 수 있다”는 등의 것이다. 관료들이 이런 답변을 할 때에는 본인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겠으나 실제로 구조가 그렇기 때문인 경우도 빈번하다.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이 모든 법과 제도들은 개중 쓸데없는 것도 있겠으나 다른 사례에 대해서는 효용을 발휘하는 것이 많다. 그러니 무작정 제도를 바꾸자고 할 수도 없다.

한 번 더 편의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은 ‘통치의 논리’로 표현할 수 있다. 통치라는 것은 여러 단체와 사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공동체를 통치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규율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저항의 언어’를 포괄하지 못한다. 바로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반드시 탄생하는 것이 ‘정치’다. 따라서 정치인은 저항에 동조하면서도 이를 통해 통치의 논리를 구현하는 매우 어려운 기예에 숙달되어야 하고 양쪽 모두에 통달해야 한다.

안희정 지사의 주장은 이 글에서 편의적으로 제시한 개념으로 본다면 ‘통치의 논리’를 강조하고 있는 걸로 볼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중도 확장’이라는 정치적 효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과거 운동권이었다가 충남도지사라는 광역단체장을 맡은 자신의 경험에서 스스로 도출한 결론인 걸로 보이기도 한다. 안희정 지사가 ‘해부 분석 비판에 근거한 20세기 지성사’와 ‘새로운 학문과 취합이라는 통섭의 관점을 취한 21세기 지성’을 대립적으로 언급한 것은 결국 저항에 방점을 찍었던 운동권과 통치를 중시하는 행정가라는 어떤 단절적 경험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JTBC 뉴스룸 보도 영상 갈무리

반면 문재인 전 대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촛불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제각기 내세우고 있는 ‘저항의 언어’들의 중요성이다. “분노가 실려 있지 않다”고 지적한 것은 안희정 지사가 통치의 논리에 기울어진 나머지 이 부분을 중요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다. 사실 서구에서 진보정치의 실패는 이런 문제 때문에 현실이 된 측면이 크다. 지구촌 곳곳에서 진보정치의 실패로 갈 곳을 잃은 ‘저항의 언어’들은 이제 극우정치의 자양분으로 기능하고 있다.

안희정 지사가 강조한대로 ‘선의’를 전제하고 20세기적 비판을 해보았으니 이제 21세기적 제안을 해야 할 대목인 것 같다. 특히 이 나라에서 대권주자들이 가진 정치관은 그들이 실제로 선택하는 정치 행위를 통해 해석되는 것이지 자신의 일방적 설명에 의해 드러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세계관을 대중에게 그저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떤 통치자의 자세일 수는 있어도 정치인의 자세로는 부족하다.

대통령 선거는 행정부의 수장을 뽑는 절차이지만, 얼마나 탁월한 정치적 기예를 발휘할 역량이 되는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게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나라에서 대통령이 가진 힘은 단지 행정가로서의 역할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행정가로서 탁월할지라도 정치인으로서의 소양이 없다면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되더라도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안희정 지사가 “생산적 토론이 중요하다는 말을 즉석에서 하다 보니 표현이 그렇게 됐다”고 말하는 대신 자신의 정치관을 일방적인 장광설로 표현했다는 점, 그 장광설의 진의마저도 듣는 이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점, 결과적으로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손해를 끼치게 됐다는 점, 그럼에도 그런 이해득실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 점은 정치인으로서의 소양에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게 한다.

더 의심스러운 것은 이런 사례가 자꾸 쌓여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 국민과의 소통이 어려워 보이는 대권주자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어렵다. 안희정 지사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권 도전을 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 물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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