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2PM 박재범 사태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복합적인 후폭풍을 겪으며 박재범 사태는 단순히 한 아이돌 스타의 스캔들을 넘어서는 사회 문화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우리 안의 파시즘 논쟁을 일으켰고, 인터넷 권력의 속성이 폭로되기도 했고, 팬덤 문화의 진화를 보여주는 사건이 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미디어스>는 총 6차례에 걸쳐 "2PM 박재범 사태로 본 대중문화와 한국사회"의 연재를 시작한다. 박재범 사태를 관통하는 문제의식들을 총망라하는 이번 기획은 미디어스에 새로운 필진으로 합류한 문화사회연구소 김성윤 연구원이 감수해줬다. 한 개인의 문제가 사회 전체를 비추는 열쇠구멍이 되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다. 박재범이라는 열쇠구멍에 비춰 진 대중문화와 한국사회 모습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주>

나는 모든 문제의 열쇠를 (박재범 다음으로)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인 팬덤이 쥐고 있다고 본다. 이게 바로 팬덤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사랑하는 이가 궁지에 몰렸을 때, 그녀/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궁지를 돌파하면서 거의 감각적으로 세상에 눈을 뜬다.

박재범을 공격했던 네티즌들이 (그들의 언어적 한계 속에서) 애국주의로 무장했다면, 재범을 사랑하는 그녀/그는 이참에 민족 단위를 넘는 국제주의나 세계시민주의로 무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순전히 나만의 공상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정말로 놓치기 아까운 기회 아닌가. 대다수 사람들이 애국주의 프레임에 갇혀 글로벌한 세계체계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동안, 그들과 싸우면서 그녀/그는 세계시민으로 거듭난다는 것 말이다.

▲ 2PM 맴버 재범 ⓒJYP엔터테인먼트

사실 나는 재범에 대한 사이버테러를 보면서 테러리스트들이 갈수록 제무덤을 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게 물씬 풍기긴 하는데 그걸 애국주의로 해소하려든다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나. 가진 자에 대한 분노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데, 그게 제 갈 곳으로는 가지 않고 박재범이라는 만만한 상대를 찾아가니 말이다. 그것도 실효성과 순도가 한참 떨어지는 애국심을 강요하면서 말이다.

그 사이에 2PM 팬들은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적어도 2PM 팬들이라면 애국주의 프레임을 깨부수고 대안적인 사유를 획득할 수 있겠구나. …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미 판명 나고 있는 것처럼 대다수 2PM 팬들 역시 애국주의라는 프레임을 쉽게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2PM의 그녀/그는 애국주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재범에게 애국심이 없는 건 아니에요’라든가 ‘재범도 사실은 애국심을 갖고 있었어요’라면서, 그녀/그가 그토록 혐오하는 악플 네티즌들의 ‘누구나 애국해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해주고 있다.

나로서는 의외의 결과다. 한편으로는 내가 어떤 기대감과 희망에 매몰된 탓에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었다는 반성을 해야겠다. 희망이 독이 될 수 있다는 미실의 가르침을 깜빡했다. 한국 대중문화 팬덤은 희망적인 가능성을 가진 딱 그만큼 절망적인 불가능성도 같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 달라진 팬심

이제는 신화로 남아버린 서태지 팬덤은 재림하지 않는 것일까. 기획사와 싸우고, 미디어와 맞장 뜨고, 인디씬과 논쟁을 펼치던 서태지 팬덤 말이다. 물론 이런 바람은 독이 될 뿐인 희망일 것이다. 서태지 팬덤이라는 실제 사례가 존재하다보니, 세상이 바뀐 건 도외시한 채 무슨 일만 벌어지면 자꾸 옛날 케이스에 짜맞추는 아주 안 좋은 버릇이 생기곤 한다. 그리하여 면밀한 검토나 별다른 생각도 없이, 팬덤에게 ‘정치적인’ 문화실천을 기대하는 비평적 관행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돌 팝문화가 정착되면서 스타와 팬의 동일시 메커니즘에 변화가 나타난 건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태지 팬덤이 서태지의 투사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라면, HOT 이후 무수한 아이돌 팬덤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조직화됐다. 이것은 ‘동생’같은 마음에서 속칭 ‘빠순이’로 팬심 자체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비평가들은 (성애적 실천을 제외한다면) 팬덤에게 더 이상 사회적 실천이나 연대를 요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망조차 쉽게 내놓을 수 없게 되었다. 서태지 팬덤 따위는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그냥 단 한번뿐인 예외였던 셈이다.

그 사이에 아이돌 팬덤 문화는 진화하기 시작했다(물론 진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HOT, 젝키, SES, 핑클, GOD 등의 1세대 아이돌 문화가 종식을 고하자, 2004년을 즈음하여 동방신기를 필두로 2세대 아이돌 문화가 부상했다. 1세대 아이돌 그룹을 쫓아다니던 10대 팬들은 어느새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기획사들은 연예산업에서 좀 더 안정적인 시장활동을 위해 팬클럽을 직접적으로 관리하거나 조율하는 식으로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아이돌 팬덤 문화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오늘날 팬덤을 두고 옛날식의 빠순이를 떠올린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스타에 대한 배타적 애정과 충성을 바쳤던 그 옛날 빠순이들이 개방적인 애정과 소비자 정체성으로 무장한 ‘고객님’으로 귀환했기 때문이다. 이제 20대와 30대가 된 그녀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팬덤 내부에서 10대들의 팬질에 소중한 멘토가 된다. 여전히 ‘사생팬’ 같은 팬들이 있기는 하지만, 팬덤의 주요한 경향은 (특히 ‘짐승돌’ 2PM 팬들에게서 두드러지는데) 예전의 순진한 집착에서 벗어나 ‘때팬’처럼 적당히 때묻은 팬심으로 변모하고 있다.

기획사와의 관계도 크게 변했다. 예전에 멤버 퇴출 문제 등으로 인해 HOT나 GOD 팬들이 기획사와 미디어를 향해 공세를 퍼부었던 데 반해, 지금의 팬들은 기획사와 강력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팬심의 강도 자체는 변함이 없을 텐데, HOT 시절 그렇게 강력하게 반향하던 팬덤이 (같은 SM 계열의) 동방신기 시절에 와서는 오히려 충돌과 갈등을 봉합하려고 먼저 나선다. 미디어에 대해서도 팬들이 십시일반해 도시락을 돌린다든가 하면서 스타가 시장에서 성공하도록 뜻을 같이한다.

▲ ⓒJYP엔터테인먼트

사태가 사회적 문제로 비화돼선 안 된다?

말이 나왔으니 얼마 전 동방신기 사태의 경우를 보자. 멤버들 몇 명이 계약 문제로 인해 기자회견을 열었을 당시만 해도, 사태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을 시점으로 팬들 내부에서도 의견이 오락가락했다. 멤버들 말이 맞다, 그래도 SM을 배신해선 안 된다, 그렇지만 SM이 어디 하루이틀이냐 등등. 그런데 이렇게 (정치적일 수도 있는) 다양한 의견들은 곧바로 (공교롭게도 너무나 정치적인) 하나의 주장으로 모아졌다. ‘어찌됐든 이번 사태가 사회적 문제로 비화돼선 안 된다.’

얼마 후, 이번에는 박재범 사태가 터졌다. 여기서도 2PM 팬들이 보였던 일차적 반응은 동방신기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각개격파식으로 네티즌들의 공세를 방어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디어의 말초적 보도를 견제했다. 순전히 애정적이고 경제적인 곳에서만 놀아야 할 ‘내 남자’가 사회적인 곳에서 구설수에 오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이돌 팝문화에서 팬덤은 스타-팬의 섹슈얼리티적 관계뿐만 아니라, 기획사보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스타의 시장상황에 민감해 한다. ‘엄마’나 ‘이모’ 혹은 ‘삼촌’을 자처하는 그녀/그에게 ‘내 남자의 비즈니스’는 사랑만큼이나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녀/그는 ‘내 남자’가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꺼려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실천이라든가 인식의 확장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랑이란 단지 둘만의 관계가 아닐진대 사적인 문제(재범의 발언이나 스타-팬 관계에 모두 해당한다)로만 치부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건 애국주의의 자가당착에 빠진 대중들만큼이나 제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는 팬심이다. 우리 중 그 누구라도 사회적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그녀/그는 자꾸만 둘만의 세계로 도망치려고만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퇴행적으로만 품으려고 한다.

물론 나는 한국 대중문화의 전망을 비판할 뿐 비관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재범이 퇴출당하고 2PM의 유닛 조합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팬들이 보여주는 또 다른 ‘팬질’ 속에는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분명 낙관적인 요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녀/그의 애정이 ‘비즈니스 프렌들리’하다고 해서 순수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사랑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 그런 형식적인 문제로 포착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 자체는 견고하다. 사랑이란 감정은 매우 기묘한 것이어서 때때로 실재 조건 상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한계를 돌파할 수도 있다.

팬심이 문제의 재생산에 공모하는 셈

나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팬심은 어쩔 수 없는 팬심에 불과한가. 오늘날 팬심을 둘러싼 객관적인 조건은 불온하기 그지없다. 알다시피(또한 내가 지난 연재 글에서 줄기차게 강조했듯이) 연예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사회적 담론, 시장주의 논리를 첨예화하는 연예산업의 생리, 무비판적으로 자기복제하는 미디어의 관행, 그리고 애국주의 따위로 매몰되는 이데올로기적 환경 등은 다음 차례의 또 다른 재범이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상황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판도에 열쇠를 쥐고 있는 팬덤은 기획사와 미디어를 위시로 하는 연예산업에 이미 친화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팬심은 ‘내 남자’가 무사히 복귀할 수만 있다면 다른 문제는 상관없다는 태도로 공고화되고 있다. 그녀/그마저 박재범 사태의 객관적 모순을 봉합하려 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그의 팬심이 그토록 진저리치고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문제를 재생산하는 데 공모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내 남자’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고압적일수록 문제를 사회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가능해지기는 한다. 그렇지만 그 방해가 없어지거나 수그러드는 상황이라면 아마도 그녀/그의 팬심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사고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만 안전할 수 있다면 말이다.

다시 한 번 묻자. 팬심은 팬심인 것인가.

<글 싣는 순서>

① ‘연예인은 공인이다’의 숨은 논리
② 연예기획사의 생리: SM, YG, JYP의 기업문화
③ 찌라시 언론들의 ‘삼각 동맹’
④ 애국주의에 빠진 '빠순이들'
⑤ 그래도 팬심은 팬심인가?
⑥ 오역이었다니! … 그러므로 모순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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