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포기 문제를 체제보장 및 경제지원과 맞바꾸기 위해서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한꺼번에 타결한다 해도, 결국 타결된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은 단계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이와 유사한 2.13합의가 있었는데 실패한 것은 단계적 합의방식이어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이행과정인 2단계와 3단계 과정(북핵 불능화와 폐기) 사이에서 검증이라는 문제를 잘못 푼 까닭이다”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이 5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 발언인데 정확하고 명쾌하다.

경향신문 10월6일자 3면

2005년 9월19일 6개국이 합의한 9.19공동성명, 2007년 2월13일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같은 해 10월3일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 조치’ 등의 합의의 기록이 있다.

2.13합의의 주요 내용은 향후 60일 이내에 북은 영변 핵시설의 폐쇄․봉인(shut down and seal)하고 IAEA와의 합의에 따라 모든 필요한 감시 및 검증활동 수행, 모든 핵프로그램 목록을 6자회담 참여국과 협의키로 했고, 미국은 북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과정 개시, 대북 적성국교역법 적용의 종료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북미양국은 국교정상화를 위한 양자대화를, 북일 양국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양자대화를 개시하며, 6자회담 참여국들은 북에 대한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과 협력을 분담하기로 했다. 이게 그 유명한 ‘행동 대 행동’ 원칙이다.

2.13합의에 따라 북과 미국이 합의 수순을 제대로 밟았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그랜드바겐’은 벌써 이뤄지고도 남았을 테다.

한겨레 10월6일자 5면
참여정부는 ‘동북아경제공동체구상’ 속에서 이 합의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대북 협상의 주체로 자리잡았다. FTA, 환율, 에너지, 물류 등 역내 공동 현안 해결을 위한 정책 협의 및 공조단계로서의 ‘동북아경제협력체’와, 통화 통합 등 실질적인 단일시장 형성과 거시경제 및 대외경제정책 등에서 공동정책을 수행하는 단계로서의 ‘동북아경제공동체’ 구상을 내놓았다. 실현 가능하고 용이한 사업부터 추진하는 단계적 접근원칙, 다양한 협력사업과 FTA를 동시에 추진하는 동시병행원칙, 동북아경제협력을 통해 북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남북경협 연계원칙을 추진 원칙으로 삼았다. 사실상의 남북연합 단계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10.4선언에 이 원칙들을 오롯이 녹여냈다. 참여정부가 만들어놓은 10.4선언과 후속 회담의 내용과 형식을 간추려 이어가기만 했어도 ‘그랜드바겐’ 같은 것을 고안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1992년 1월20일 정원식 국무총리와 연형묵 총리가 서명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공동선언’을 진지하게 읽어보기만 했어도 ‘그랜드바겐’과 같은 기이한 발상을 꺼내놓지는 않았을 듯 싶다.

‘그랜드바겐’은 지금까지 남북과 북미, 그리고 6개국이 힘들게 쌓아온 합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 시점에 ‘북이 핵을 포기하면’이라는 조건을 다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한 2005년 9.19공동성명 이전으로, 멀리는 1992년 1월20일 공동선언 이전으로 돌려놓는 시비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랜드바겐’이 뉴스가 된 건 지난 9월22일,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서 “이제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프로그램의 핵심 부분을 폐기하면서 동시에 북한에게 확실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국제지원을 본격화하는 일괄 타결, 즉 그랜드바겐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회자됐다. G20 회의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 남북문제는 물론 국제적 이슈에 대해서도 우리의 비전과 해법을 내놓고 주도하는 노력을 할 때가 되었다”며 “이번 미국 방문에서 북핵문제에 대한 일괄타결, 즉 ‘그랜드바겐’을 제안한 것도 그 일환”이라고 과시했다.

그냥 한 번 이야기해본 거라고 한다면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중요한 현안에 나름대로 해법을 던지고 실천에 나서겠다는 걸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북핵 해결이란 건 여간 덩치가 큰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북핵은 북의 주장을 떠나 ‘북미 대결의 산물’의 속성을 뚜렷히 하는 지라, 남이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가 아닌 역사적 맥락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그랜드바겐’을 유명환 외통부 장관은 “핵심부분인 핵무기와 핵물질의 폐기 등을 합의해 놓고 이행은 단계적으로 해 나가겠다는 것”으로 “6자회담 5개 참가국간에 협의해 온 사항”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앞으로 구체적으로 로드맵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비핵개방3000 구상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통합 접근법”으로 “비핵개방3000은 구상이고, 그랜드바겐은 이런 구상을 압축적으로 하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북은 이미 9월30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조선반도 핵문제는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산물로서 철두철미 조미 사이에 해결돼야 할 문제”로 “(그랜드바겐은) 조미 사이의 핵문제 해결에 끼어들어 방해하려는 것”으로 일축한 바 있다. 유명환 장관과 현인택 장관이 내놓은 해설은 북의 입장이 아닌 3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여간 군색하지가 않다. 두 장관의 풀이대로라면 ‘한 방 후 단계 밟기’라 하겠는데, 이 ‘한 방’이 도대체 먹힐 만한 최소한의 개연성이 있는가라는 점이다. 9.19공동성명과 2.13합의 프로세스, 즉 이행 단계 약속조차 삐거덕댔던 것이 북핵 해결을 둘러싼 외교의 현실이고, 당사자인 북이 ‘남은 빠지라(조미 사이 문제)’는 태도를 견지하는 이상 카운터 펀치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랜드바겐’은 협상용이 아니라 협박용 내지 과시용이라는 평가가 정확해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10일 중국에서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담에 참가하는데, 중국과 일본 정상을 만나서 또 그랜드바겐을 이야기할 거라는 관측이 나온다. 부디 남경필 의원의 지적을 곱씹으며 중국을 다녀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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