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플린 미 국가안보보좌관이 사퇴하면서 미국 정치도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동아시아 정세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파탄에 빠진 한국정치를 되돌아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미국의 예를 통해 깨닫는 것은 이 나라 정치가 트럼프 덕분에 희화화되긴 했어도 전례 없는 스캔들 앞에 ‘체제’가 작동하기는 했다는 것이다. 마이클 플린 전 보좌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에 러시아 대사와 통화를 하며 대러시아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는 사실은 연방수사국(FBI)의 조사 덕분에 밝혀졌다.

의혹이 제기되던 시점에서 오바마 정권 인사인 샐리 예이츠 당시 법무장관 대행은 마이클 플린 전 보좌관이 거짓해명을 했다는 점을 들어 이게 러시아에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고 한다. “전화 통화는 있었지만 대러시아 제재 해제 논의는 없었다”는 해명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언제든 러시아가 밝힐 수 있고, 이는 ‘협박’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결국 마이클 플린 전 보좌관의 사임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이러한 판단이 받아들여진 결과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마이클 플린 전 보좌관이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마이클 플린 전 보좌관의 ‘거짓 해명’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언론 등을 통해 국민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 정치의 문법에서 공직자가 잘못되면 ‘반역’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면서 이에 대한 거짓말까지 했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경우였다면 어땠을까. 희대의 국정농단 사건 수사에 대해 검찰이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말기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수사가 진행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법률적으로 방어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변호사들이 사실상 날조에 가까운 주장을 연일 내놓고 있는 것도 우리와 미국의 처지를 비교하도록 만든다. 이들 중 일부는 탄핵심판 과정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장외의 여론에 호소하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세력은 이런 모든 행위들을 ‘있을 수 있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적용 과정에서 ‘영혼 없는 공무원’들이 그저 지시에 따르며 권력에 복종하는 태도로 일관했다는 점은 민주사회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이런 현실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 공무원들이 단지 영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고통 받아야 했다는 사실은 이게 단지 몇 명의 인물들이 아닌 체제 자체의 문제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40%를 상회하는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제1야당에 대한 강력한 지지의 동력 중 하나는 국가가 국가의 기능을 하지 않는 비정상적 상황을 바로잡겠다는 대중적 열망으로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이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억지 논리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대중적 여론이 더 강해지는 상황을 낳고 있다. 모든 게 최순실 씨와 불륜관계인 고영태 씨의 음모이며 JTBC를 비롯한 언론과 야당이 권력욕 때문에 이에 휘둘리고 있다는 주장을 국가지도자가 반복하는데도 체제가 손 쓸 방법이 없다는 것에 국민들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상태다.

이는 최근 반복 확인되는 ‘문재인 대세론’의 토양이 되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나 바른정당의 유승민 의원 등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인용이 결정되면 현재의 상황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의 국면이 ‘누가 더 나은 지도자인가’로 바뀔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과연 그럴 것인지 확신을 가지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믿는 국민들은 끝까지 안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안철수 전 공동대표나 유승민 의원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보다 나은 지도자라고 생각할 이유가 별로 없다. 설사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못해도 박근혜 대통령보다는 잘하겠지”라는 논리가 이런 비교우위의 효과를 상쇄한다. 새롭게 바람을 타는 후보를 지지하기보다는 2012년에 한 차례 검증된(?) 문재인 전 대표를 지지해 정권교체를 확실히 하자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정권교체로 새로운 대통령의 시대가 왔는데도 사람들이 “바뀐 게 없다”고 생각하는 시나리오다. 이 경우 기성정치는 그야말로 궤멸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서구 정치에서는 바로 이런 상황이 극우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파국적 정치를 막기 위해서 야당의 정치는 실제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춰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촉발된 동아시아의 위기는 이 ‘문제 해결 능력’을 검증하는 첫 번째 난관이 될 수 있다. 마이클 플린 전 보좌관은 한국과 미국을 연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던 걸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 외교부는 마이클 플린 전 보좌관의 사임이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사실상 트럼프 행정부와 소통 채널이 없는 것은 사실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마이클 플린 전 보좌관의 사임으로 그보다 더 극우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에게 외교정책의 키가 쥐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제2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 겸 선임고문은 현재 NSC 상임위원직을 겸임하는 상태다. 스티브 배넌 고문은 외교안보적 식견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라는 게 미 언론의 대체적 평가다.

이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들은 백악관에서 공화당 주류로 전국위 의장 출신인 라인스 프리버스 비서실장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라인스 프리버스 비서실장과 함께 제거(?)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은 숀 스파이서 대변인이다. 이 결과로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연설문 작성가 출신인 스티브 밀러 수석정책고문일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스티브 배넌과 스티브 밀러는 모두 극우적 세계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독특한 용인술 덕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보다 강경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당장 이번 일의 당사자(?)로 찍힌 러시아가 미국과 일본을 동시에 겨냥한 움직임을 내보이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러시아 대 미국 일본의 구도가 형성되는 중이다. 이 와중에 중간에서 현명한 움직임을 내보여야 할 한국은 사실상 컨트롤타워가 부재중인 상태다. 보수언론은 연일 대권주자들의 입장을 묻는다는 핑계로 외교안보적 불안감을 키우는데 진력하고 있다. 가장 문제인 것은 유력 대권주자들이 현 상황에 대한 대책을 자신있게 얘기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는 점이다.

14일 문재인 전 대표 측은 ‘10년의 힘 위원회’라는 정책 자문그룹을 출범시켰다. 참여정부 시절 국정운영을 맡았던 장차관 출신 60여명이 나선 것이다. 국정운영이 표류하는 상태에서 이런 그림이 든든해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단지 그림을 넘어서는 실질적이고 대안적인 정책 방향의 제시다. 야당이 확실히 정권을 넘겨받을 준비가 돼 있다는 흔들림 없는 신뢰를 국민이 가질 수 있을 때에야 진정한 의미의 ‘대세론’은 작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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