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황태자’가 살해됐다고 한다. 김정일의 첫째 아들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북한 첩보원으로 보이는 인물들에 의해 변을 당한 것이다. ‘독침’이 사용됐다고도 하고 스프레이나 독극물 헝겊이 동원됐다는 보도도 있다. 정확한 사인과 살해 방법 등은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부검 결과가 나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부 국내 언론은 이번 사건을 김정은의 김정남에 대한 콤플렉스 발현이나 북한의 무서운 공포정치의 단면 정도로 여기려는 것 같다. 왕자의 난이니 백두혈통이니를 거론하는 보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북한 내부에 ‘급변사태’를 전망할 수 있는 조짐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식의 ‘북한붕괴론’으로 연결시키는 논리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러나 북한 지배층의 ‘포악한 공포정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북한붕괴론’ 역시 보수 정권 내내 무슨 일만 생기면 제기되었던 논리라는 것을 상기하면 이번 사태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관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려면 현재 북한이 처한 상황과 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 국내 언론이 김정남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북한의 체제 이상 징후를 연상하는 것은 김정남이 중국 등에 의해 체제 붕괴의 ‘대안’으로 여겨져 온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남의 살해에는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의 직접적인 지시나 승인이 필요한데, 그간 이런 일이 없다가 갑자기 암살작전이 실행된 배경이 따로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크게 틀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실행된 배경’이라는 대목에 있다. 김정남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북한 내부 또는 외부의 문제이다. ‘급변사태’를 예감하는 흐름은 이 원인을 북한 내부에서 찾은 것이다. 김정은에 반대하는 세력이 힘을 얻고 있고 무언가 실질적인 행동에 나섰기 때문에 김정남을 암살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 아니냐는 거다. 이런 해석은 태영호 공사의 망명이나 최근 연이은 주요 인사들에 대한 숙청설과 함께 거론되고 있다.

문제는 북한 체제의 특수성 때문에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극도로 통제돼있는 북한 사회의 현실을 감안하면 김정은에 반대하는 어떤 ‘반란 세력’이 규모를 갖추고 실질적 활동에 나서고 있다는 상상을 하기는 어렵다. 만일 이런 움직임이 있다면 군대 등 기득권 일부의 이반이 가시화됐다는 걸 뜻한다. 그런데 숙청이 거듭되고 있기는 해도 어쨌든 군이 김정은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미사일이 발사된 다음날 중국은 북한의 탄도미사일 시험에 분명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미국 등과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의 입장 표명은 그들이 주장해온 ‘역내 안정화’ 등의 메시지에서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뉘앙스가 미묘해진 것은 분명하다. 메시지 그 자체 뿐이 아니라 미국의 변화된 태도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선 확인할 수 없는 내부 사정에 힘을 쓰는 것보다는 외부 환경을 점검하는 게 나은 일일 수 있다. 북한의 외부에 대해 말하자면 최근의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시험은 거듭 지적됐듯이 위협적이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임의의 시간, 임의의 장소’에서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이 발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일정상회담에 앞서 시진핑 국가 주석과 신년을 맞이한 전화 통화를 했다. 그간 대만을 특별대우(?) 해 온 트럼프는 이 통화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이 원칙은 약 40년 동안의 미국이 존중해 온 것이다. 트럼프가 아닌 사람이 이를 언급했다면 별로 놀랄 일이 아니겠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원칙은 신경쓰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다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꾼 것은 어떤 파격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시험을 강행한 것은 트럼프가 ‘하나의 중국’ 원칙 존중을 언급하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에 나선 바로 그 시점이다. 트럼프는 사건 직후 동아시아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을 100% 지지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다음날 캐나다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북한은 매우 큰 문제다. 우리는 이를 매우 중히 다룰 것(Obviously, North Korea is a big, big problem and we will deal with that very strongly)”이라고 발언했다. 일부 국내 언론은 초등학생 수준의 어휘로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트럼프식 어법에서 ‘big’이란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온 것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중국 입장에서 북한을 비호해 이후 행보를 예측할 수 없는 트럼프 정권과 대립하기 보다는 모처럼 ‘하나의 중국’ 원칙을 언급하는 상황을 고려해서라도 오히려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만일 북한에 대한 제재 수단으로서 ‘세컨더리 보이콧’ 등을 중국과의 협의 없이 미국이 독자적으로 실시하게 되면 미중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그런 파국으로 가는 방법을 선택하기 보다는 알아서 북한에 일종의 압력을 행사해 전체 상황에 대한 관리 수단을 잃지 않는 방식을 선호하리라는 것이다.

지난 11일(현지시간)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만찬장에 초대됐던 투자가이자 배우인 리처드 디에가지오가 현장에서 찍은 후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3장. (리처드 디에가지오 페이스북 캡처/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워싱턴 조야에 확산되고 있다는 ‘북한 선제타격론’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그간의 다양한 제재와 압박에도 북한이 굴하지 않고 미사일 개발이나 핵실험 등의 도전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므로 이제는 북한이 군사시설을 직접 타격하는 방안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됐다는 것이다.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수순으로 비춰지면서 이런 목소리는 더 강경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선제타격’이 현실이 될 가능성을 전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의 군사시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미국이 확보하고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운데다가 한 번에 완벽하게 북한을 군사적 불능 상태로 만들지 않으면 최소한 휴전선 이남, 더 나아가서는 미국 본토가 공격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개발에 진력한 것은 수뇌부가 괴멸하더라도 단 한 발의 미사일이 어디에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위협감을 주기 위한 것이다.

대북문제의 해결책으로 흔히 거론되는 ‘레짐체인지’는 ‘선제타격론’을 좀 더 세련된(?) 형태로 바꾼 아이디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흐름에 김정남이 등장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김정은 입장에선 중국이 김정남으로의 ‘레짐체인지’를 통해 상황을 관리하려는 시도를 경계할만한 시기였던 셈이다. 만일 김정남 암살이 대외변수와 관련이 있다면 이런 일련의 흐름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검토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정부 역시 ‘대외변수’의 주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간 여러 언론은 정부 또는 국내 일부 정치세력이 김정남과의 접촉을 시도했다는 등의 소식을 전해왔다. 이명박 정부 시기 망명설이 불거졌던 것이나 최근 주간경향 등이 이전 정권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김정남을 대북접촉 창구로 활용했다는 보도 등을 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상상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만일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보기관이 여러 이유를 고려해 김정남을 망명시키려다 실패한 게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면 이는 또 다른 평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14일 오전 국회 정보위 등에서 이 문제가 다뤄졌으나 국내 정보기관 등은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답변했다는 보도가 나온 상황이다. 불필요한 논란이 확대되지 않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특별히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