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 하늘에 12개의 우주 비행체, 쉘이 나타났다. 혼비백산한 지구인들, 18시간마다 열리는 쉘의 문을 통해 그들과 '접선'한 지구인들은 그들이 온 이유를 알아내려 한다. 하지만 도무지 그들이 보내온 외계의 '신호'를 해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 분)가 차출되는데.

2월 2일 개봉한 <컨택트>는 마치 영화 속 외계인들의 정체를 가려주는 뿌연 안개와도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외계의 실체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조차 뿌연 안개 속으로 빨려드는 듯하다. 하지만 그 모호한 안개 속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저 멀리서 두 곳의 등대가 반짝인다.

첫 번째, 언어는 소통의 도구?

영화 <컨택트> 스틸 이미지

<컨택트> 속 쉘을 타고 온 외계인들은 마치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그 어떤 것(everything else)’와도 같다. 다수의 언어학자들이 그들이 지구에 온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소통하려 하지만, 지구와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진 그들과 '불통'의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다. 지구 위의 인간들이 '언어'라는 도구로 소통을 체계화했기에, 당연히 지구인들은 자신이 했던, 아니 자신들이 '약속'했던 바의 방식으로 다시 외계인들과 소통에 이르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인간들 사이의 '약속'이라 했다. 하지만 그 스스로 훗날 그 약속조차도 규명되지 않는 행간을 지녔다 '회의'하고야 만다. 그 '인간'의 약속된 언어, 12개의 쉘의 등장한 지구 곳곳의 나라는 그들이 이뤄낸 문명의 성과로, 미디어와 과학 문명의 도움을 받아 외계인의 도래, 그 이유를 해석하고자 한다.

<컨택트>의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클리셰가 된 외계인들은 어떤가. 비행접시라 하는 그 외계의 물체를 타고 인간 세상의 상공에 느닷없이 등장하여,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마구 쏘아대며 '침공'하는 식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비행접시가 모로 선 모양부터, '왜곡'된 형상으로 혼돈을 준 쉘은 쉘의 입구를 18시간마다 기꺼이 개방하며 '소통'을 도모한다.

영화 <컨택트> 스틸 이미지

하지만 '침공'하지 않는 외계인들에 대해 지구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외계의 쉘이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세상은 '아노미'에 빠져 폭동과 파괴가 범람하며, 그 통제되지 않는 위기가 오히려 외계인에 대한 ‘무력적’ 대응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정말 '언어'가 소통이 될까? 루이스를 찾아온 군 관계자가 언어학자인 그녀가 도움을 준 미군의 작전은 '소통'대신 전멸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외계인과의 '소통'을 소란스럽게 다루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는 건, '언어'를 통해 소통을 하지만 불통인 인간의 관계이다. 외계인은 그 어떤 침공의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 '알량한' 인간 사회는 이미 통제 불능이요, 소통을 도모하기보다는 '무기'를 앞세운(물론 그 무기를 앞세운 측이 군인이 지배하는 중국이요, 러시아, 쿠바라는 빛바랜 반공주의적 선입견이 아쉽지만, 심지어 여주인공이 전해준 아내의 유언 한 마디에 결정이 뒤집히는 일인 독재사회의 설정이라니!) 진압 작전은 외계라는 '이방'을 빗댄 현실 인간 세상의 아이러니한 상징이다.

마치 우리 안에 던져진 이물질에 대해 철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물원의 원숭이들처럼,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편협하고 배타적인 존재인가를 <컨택트>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명한다. 그러기에 영화 <컨택트>은 외계와의 조우를 통한 '인간'의 투영이다.

두 번째, 우리가 혹은 내가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영화 <컨택트> 스틸 이미지

어쩌면 이 문제를 위해서 먼저 '양자 물리학과 평행 우주론' 등의 물리학 이론을 접하며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외계인이 주인공인 영국 드라마 <닥터 후>를 보면, 차원이 겹쳐지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는데, 현재의 세상에서 과거의 세상으로 이동하는 설정이 등장한다. 3차원의 세계를 살아온 우리에게 시간은 일련의 서열이지만, 그것이 양자 물리학 세계로 들어가면 차원이 확장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겹쳐지면 마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과거가 있듯이 그렇게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열린 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면 안개 속의 등대가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루이스와 딸의 일련의 시간적 인연이 풀어내진다. 그를 통해 관객들은 그녀에게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으며,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딸과의 인연이 그리 길지 않았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 아빠는? 그 스멀스멀 솟은 의심인지 질문인지에 대한 답은 영화 마지막에 설명된다.

외계의 등장과 함께 혼돈스러운 인간 세상과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동시에 진행되는 루이스의 병적인 혼돈. 고통은 영화 말미에서야 영화 초반 보여준 스포의 진실을 드러낸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루이스는 언어학자로서 18시간마다 쉘로 들어간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외계와의 조우를 우려한 '인간 세상' 방식의 멸균 상태로, 갖가지 보호복으로 중무장한 그녀. 하지만 외계인과의 만남 과정에서 그녀는 소통은 그저 '언어'를 학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 보호복을 벗어 제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와 외계인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영화 <컨택트> 스틸 이미지

그렇다면 그 '소통'은 무엇이었을까? 훗날 중국의 장군이 그녀를 보러왔다고 했던 그 리셉션에 걸린 외계의 언어, 그것이었을까? 지구인들은 그녀가 해독한 외계의 언어에서 '무기를 주러 왔다'는 말에 당장 '전투태세'를 갖춘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무기의 다른 의미가 '선물'임을 재해석한다. '무기'로도 '선물'로도 해석된, 마치 산타 할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던 외계의 방문. 그 방문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건 루이스고 그건 바로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러기에 그건 선물이자 무기가 되는 것. 하지만 그녀는 고통스러운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외계와의 소통에 자신을 기꺼이 열었듯, 그 외계가 준 '운명'의 선물에 역시나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연다.

하지만 루이스 개인이 받은 '선물'과 앞서 인간 세상의 한계를 보여준 '소통'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결국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인식이라는 풀 안에서 규정지어놓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열린 마음이다. 혹시나 언젠가 영화 속 외계인들처럼 그들이 정말 선물을 들고 소통하기를 바라고 왔을 때, 아니 먼 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세계 안의 이방인들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을 둘러싼, 심지어 당연한 흐름인 시간에 대해조차 예단과 편견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통과 사랑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깜빡깜빡 안개속 등대불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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