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인사 청문회의 본질이 세종시에 있는가? 지상파 3사는 그렇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제(21일) 지상파 3사 메인뉴스는 모두 정운찬 청문회를 묘사하며 세종시를 주된 풍경으로 놓았다. 과연, 그러한가? 세종시가 정운찬 검증의 본질이냐 말이다. 아니다. 틀렸다. 철저히 잘 못 짚었다.

쏟아진 의혹이 워낙 많다보니 뉴스가 갈팡질팡 헤매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식의 착오를 유도하는, 철저히 의도된 행위이다. 헛 것을 앞세워 헷갈리게 하려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세종시는 정운찬의 덫이 아니다. 세종시는 그저 검증의 덫일 뿐이다. 정운찬은 세종시 추진에 대한 찬반을 따지는 질문에 그는 시종일관 그것은 비효율적 '프로젝트'라고 답하고 있다. 점잖은 답변이다. 그 텍스트는 두 개의 이미지를 가동시킨다. 하나는 경제 석학 정운찬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또 다른 하나는 충청 출신인 그의 태생을 부각시킨다. 정운찬으로서는 하나도 잃을 게 없는 논쟁이다. 정운찬이 잃을 게 없다는 것은 그를 임명한 둘러싼 집단 역시 그 논쟁에서 내줄게 없다는 말이다.

▲ 한겨레 9월22일 1면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세종시를 반대한다는 그의 텍스트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벗어난다. 다른 경제학적 반론이 나와야 한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정운찬에게 과감한 반론을 던질 이가 있는가? 적어도, 민주당에는 없다. 경제적 관점에서 세종시가 타당한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른다. 정운찬은 그 얘길 하고 있다. 물론, 정운찬의 발언은 정치적으론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런 언어게임에서 정치는 자체로 열등한 것이다. 정운찬은 한국사회에서 정치와는 비교 할 수 없이 우월한 경제의 관점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그 경제학의 뼈대에 '소신'이라고 하는 정치적 결사의 외피를 입히고 있다.

충청 출신이기에 할 말은 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확실히 그른 것이긴 하다. 정치적 관점에서 그렇다. 이걸 갖고 근 보름 가량 화두로 삼은 셈이다. 그러나 찻잔 속의 논쟁, 제자리 지켜야 하는 국회의원들의 자위일 뿐이다. '우리가 남이가'는 한국 정치에서 매우 익숙한, 통용되는 문법이다. 지역과 의리를 상용화하는 정치의 문법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정운찬은 세종시가 충청도의 정치라면, 그걸 밑밥으로 자기가 더 큰 걸 하겠노라는 희망을 충청도에 던지고 있다. 충청도 출신 대통령의 실현 가능성이 사촌의 땅이 비싸지는 세종시에 비해 작은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세종시 논란을 그는 자신이 남이냐는 질문으로 치환해냈다. 결국, 그는 잃을 게 없다.

그러나 세종시가 부각되면서 감춰지는 것들은 막대하고 또 참혹한 것이다. 오늘만 해도 그를 향한 세금 탈루, 스폰서, 포괄적 뇌물죄 의혹 등이 '도덕성'이란 한 마디로 간결해졌다. 그를 향한 의혹만 간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론은 벌써 앞선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것들까지 축약해버렸다. 어제 지상파 뉴스는 흠결 없는 사람 어디 있느냐 묻던 조중동의 논리가 언론 전체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혹되지 말자. 어느 실용적 민주주의 선진 국가에서 서민을 위해 일할 장관, 총리 후보자들이 이토록 삶의 길목 마다 제 몸 하나만 편히 눕고자 위법과 탈법을 저지르며 출세한단 말인가? 열보 백보 아니 천보 만보쯤 양보하여 그걸 그 시절의 관행이라 치자. 그렇다면, 그 관행대로 그냥 제 몸 하나 편히 뉘이며 살아온 이들은 그저 삶이 편안했음에 만족하고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누워 살아가는 것이 합당하다. 제 몸, 제 가족들 편히 뉘이고자 물불 안가리던 이가 국민과 국가를 떠드는 것 자체가 볼썽사나운 꼴임은 물론이요, 읊어주는 대로 받아 적는 언론의 수준을 확인하는 것도 이만저만 한심스런 일이 아니다.

게다가 대단한 병역비리 사건까지 터졌다. 경찰의 수사 스케줄에 일말의 고려와 노림수가 있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경찰청장까지 직접 나서 사건에 힘을 실어주시니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 모르겠다. 어제 뉴스들도 순서만 인사청문회 바로 뒤였지, 꼭지 숫자나 취재 공력으로만 보면 이게 더 큰 뉴스였다. 물어보자. 젊은 날에 군대 가기 싫어 팔 뺀 이들과 인사청문회에 나오는 이들 중에 도덕적으로 더 부패하고, 피폐한 이들은 누구냔 말이다. 행여나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의도로 분노가 관리되거나 바꿔쳐졌다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지만 말이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표현 중에, '사회적 합의'란 것이 있다. 그 아름다운 표현에 반대했던 이들은 각자가 처한 사회적 형편이 다 다른데, 이를 덮어두고 합의라는 명분아래 사회라고 하는 거시 체계를 굴복시키면 되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했었다. 나도 대체로 그런 입장이었다. 이번에 오랜 만에 인사 청문회를 보며, 바로 그 문제적 표현 '사회적 합의'가 떠올랐다. 인사청문회에 대해 언론이 생각하는 '사회적 합의'는 무엇인가? 민주당의 입장에 서서 정운찬을 반대하란 뜻이 아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인사를 대충 넘어가 이 모두를 '중도'로 합의하자는 이들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말이다. 어찌되었건 청문회를 했으니, 국회 내의 다수당이 찬성할 것이니 '사회적 합의'는 이뤄진 것인가? 언론이 이렇게 그때그때 다르게 대충 살고 있으니 세상이 이토록 탁해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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