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사퇴 이후 상황을 반영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있으나 판이 바뀌려는 움직임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보수적 유권자층의 표심을 흡수하는 가운데 야권에서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황교안 총리의 경우 출마 여부도 확정할 수 없는 상태이며 안희정 지사는 당내 경선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더불어민주당의 정당 지지율은 2009년 5월 이후 거의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보수세력은 거의 ‘멘붕’이다.

보수세력의 딜레마는 이른바 ‘태극기 집회’를 둘러싼 정황에서 더 분명해지고 있다. 새누리당 소속으로 대권 도전 의사를 밝히고 있는 이인제 전 새누리당 최고위원과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지난 4일 덕수궁 대한문 앞의 집회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이 집회에서 김문수 전 지사는 “단두대를 끌고 상여를 메고 다니는 일부 극악무도한 세력이 있다”, “이것도 부족해서 대통령의 속옷까지 다 벗겨 국회에 전시했다. 이런 세력들이 정권을 잡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다. 이인제 전 최고위원도 집회 참석 직후 SNS 등에 “태극기 물결은 애국이고 조국의 미래를 향한 열정이다”, “야당 대세론은 거품에 불과하다”는 등의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인명진 비대위원장을 영입해 당내 개혁의 시늉을 하던 새누리당이 노골적으로 극성 보수 지지층에게 손을 내미는 모양새인 것이다. 새누리당 인명진 비대위원장은 황교안 총리를 유력한 대권주자로 언급한데 이어 새누리당의 당명을 ‘보수의 힘’으로 정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과거 ‘박근혜 비대위’의 사례처럼 박근혜 대통령과 선을 긋고 정권재창출을 위해 중도로 이동하지 않겠느냐는 기존의 관측을 전면 부정하는 행보다.

새누리당은 이것 외에도 국민제일당과 행복한국당 등을 당명 후보로 고려하고 있는데, 당명이 무엇이 되든 로고는 태극기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정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흰 바탕에 빨간색과 파란색을 활용한 문자와 로고 등을 배치하자는 것이다. 아예 당명을 ‘태극기당’으로 하면 어떠냐는 제안이 나온다는 보도도 있다. 중도로의 변신이 아니라 ‘극우본색’으로 혁신의 방향을 잡는 모양새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4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보수단체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김문수 측 제공/연합뉴스)

새누리당이 일제히 ‘친 태극기’로 달려가는 배경에는 대권주자로서 황교안 총리에 대한 지지율이 높다는 사실이 작용하는 걸로 보인다. 국민일보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여론조사(3일부터 4일까지 전국 성인남녀 1059명 대상 실시, 유무선 전화면접 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0% 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의하면 황교안 총리는 전체 응답자 중 32.5%의 지지를 얻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32.5%)에 이은 16.0%의 지지를 얻어 2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황교안 총리의 출마 자체에 대한 부정적 여론 역시 무시할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이다. 이 조사에서 황교안 총리가 출마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답변은 60대 이상 고령층 유권자를 제외한 전 연령층, 전 지역에서 과반을 넘기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60대 이상과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각각 48.9%와 60.1%로 불출마 여론이 우세했다.

동아일보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3일에서 4일까지 진행한 여론조사(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1012명 대상, 유무선전화 면접조사 각 50%, 성 연령 지역별 가중치 부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0% 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드러났다. 이 조사에서 문재인 전 대표는 28.7%, 황교안 총리는 10.0%의 지지를 얻었는데, 주요지지층인 보수층에서도 출마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이 35.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탄핵 인용 결정 후 출마하는 것은 문제없다는 응답은 60.3%였다.

여론조사의 수치를 보면 이 계층은 일단 바른정당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이 크지 않은 걸로 판단된다. 바른정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유승민 의원은 6일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인터뷰에서 “전통 보수라는 박근혜 지지층의 비토가 내게는 최고의 난관이다”, “전체 국민 중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 많으면 나는 대선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살아남는 것도 어려울 거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운데)가 3일 오후 서울시 용산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전통놀이 프로그램을 참관하며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과 함께 어린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새누리당의 행보는 황교안 총리의 출마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이 지지층을 누가 가져갈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반영된 걸로 보인다. 새누리당이 ‘태극기 집회’에 우호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기만 해도 최소 10%~15%의 득표는 보장할 수 있다는 판단도 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대선에서 15%의 득표는 이후 정치일정을 주도할 수 있는 주요한 자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만일 꾸준히 확인되고 있는 ‘문재인 대세론’에 대한 반대 흐름에 ‘색깔론’이 결합하면 보수후보의 득표율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조선일보가 이날 사설에서 ‘태극기 집회’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보면 드러난다. 조선일보는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이들의 주장 중에는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종북(從北)’으로 몰거나 계엄령 선포를 주장하는 등 사실과 다르거나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적지 않다”면서도 “주장이 무엇이든 이들 대다수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인식은 ‘대한민국을 지키자’는 생각이라고 한다. 집권이 유력한 야권 대선 주자들의 안보관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야권이 사드 배치에 반대하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에 대한 재개를 주장하고 있어 ‘태극기 집회’의 규모가 더 거세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조선일보의 이런 주장은 보수정치의 위기를 잘못된 관점으로 진단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일보 지면에 실린 칼럼을 보면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중앙일보 김진국 기자는 그간 야권은 생각이 달라도 서로 타협하는 방식의 선거전략을 써왔지만 보수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왔다고 평가했다. “태극기 집회를 보면 걱정이다. 이 땅의 보수를 정말 사라지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고도 했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태극기 집회에 나선 ‘아스팔트 우파’들이 기성 정치와 체제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상태가 돼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정치를 붕괴시키고 극우화 바람을 이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쉽게 볼 일이 아니다. 더 문제는 이 정권이 이런 ‘아스팔트 우파’들을 전경련을 통한 편향적 지원으로 키워줘 왔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는 거다. 한겨레는 이날 1면에 전경련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간 38개 보수 우익 단체와 개인에게 총 61차례에 걸쳐 25억여 원을 직접 지원했다는 의혹을 배치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여기에 기대 뭔가를 시도하고 있으니, 보수정치는 거의 ‘자살’을 택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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