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우_ 2012년부터 이주노동조합의 상근자로 일을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대안학교 선생님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고 있어서 언젠가는 이주아동 대안학교 선생님을 하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일을 한 지 5년이 되어가지만 부족한 외국어실력 탓인지 가능한 한국어로만 상담을 하고 있다. 이주노조 합법화 이후에 다음 역할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스스로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지난 이주노조 활동 5년, 설렘 성과 회의 무력감 그리고 해답 찾기(1) 편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2016년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를 마치고 집회 물품을 정리하기 위해 늦은 저녁 이주노조 사무실에 들렀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짐을 정리하다 문득 내일이면 한국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미국 뉴욕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친구를 방문하러 가는 2주간의 여행에 대한 두근거림도 있었지만, 과연 다녀오면 이 무기력한 마음이 바뀌어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그 당시에 활동을 그만둬야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지만 일단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생각해보자는 마음으로 훌쩍 떠났다. 그렇게 2주 동안 맛있는 것도 잔뜩 먹어보고, 현지에서 이주운동을 하는 민권센터를 방문하여 인터뷰도 하면서 나름 알찬 시간을 보냈다.

꿈같은 2주간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솔직히 출근하는 그 순간이 너무 두려웠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봤다 한들 내 현실의 문제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마음에, 뉴욕여행은 일장춘몽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면서 다시 현실에 적응할 때 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꾸 힘들다고 주변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보다, 정말 내가 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보고 그만두더라도 그만두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심리상담을 받아보기로 하고 좋은 분을 추천받았다.

뉴욕여행을 다녀온 5월부터 반년 가까이, 매주 화요일 저녁 한 시간은 무조건 스스로를 위한 시간으로 잡아놓고 어떠한 약속도 잡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상담선생님 앞에서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가족, 연애, 활동, 결혼, 건강, 노동조합 등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고민들을 아주 천천히 꺼내놓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상담을 하면 할수록,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예를 들어 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죄책감과 억울함, 인정받고 싶은 감정이 자리잡고 있음을 인지하는 데도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내 마음에 드릴을 작동시켜 겹겹이 쌓인 단층 밑으로 조금씩 뚫고 내려가기 시작했고 평소 꾹 참고 있던 감정,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매주 한 시간씩 일주일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상담 시작할 때에 비해 시간이 흐르고 나니 분명한 말의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상담이 20회 차에 다다랐을 때 쯤, 상담선생님이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살아온 것 같은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었다.

“저는 31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잘 살아왔습니다. 앞으로 여러 일들이 있겠지만 분명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 대답에서 분명한 말의 힘이 느껴졌다고 했고, 슬슬 상담을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신기한 것은 운동을 꾸준히 하면 체력이 늘어나는 것처럼 상담을 꾸준히 하고 나니 마음의 힘이랄까, 근육 같은 게 튼튼해졌다는 확신이 생겼다. 상담이 종료된 이후에도 종종 우울하거나 현재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한 회의감 같은 게 올라온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냥 지금 내가 그런 기분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상담이 만병통치약처럼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는 옛 말처럼 상담과 함께 매주 1~2회 이상 꾸준하게 헬스 운동을 병행했다. 엄청난 체중감량을 하거나 근육을 만들려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기초체력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2015년 여름 약 한 달간 이주노조 합법화 농성을 하면서 땡볕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고갈되는 것을 절실히 느낀 후 그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노동조합 활동이 늘 술자리를 달고 다니는 자리인지라 1년 넘게 운동을 해도 여전히 아저씨 체형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본인만 알 수 있는 작은 신체의 변화를 만끽하며 지속가능한 운동을 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네팔 버즈라동지와 함께

한 가지 더,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은 그동안 국내에서만 만났던 이주노동자들의 본국을 직접 찾아가 귀국한 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의 가족, 본국의 이주노동자 지원 활동가 등을 만났던 두 번의 여행이었다. 필리핀에서는 정말 만나고 싶었던 미쉘 이주노조 전 위원장과 미그란테 동지들을 만났고, 네팔에서는 이주노조를 직접 만들고 381일간의 명동성당 농성의 주역이었던 버즈라, 샤말, 데이빗 동지 등 신미궈 활동가들을 만났다. 미그란테와 신미궈 둘 다 국내/외에 있는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지원과 조직 활동을 하고 있는 소중한 국제연대의 거점이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이주노동자 송출국과 유입국에서 운동의 선순환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밑그림이 이주동지들과의 교류 속에서 점점 뚜렷해졌고, 한국에서의 이주노조 활동이 그만큼 중요할 것이라는 확신도 생겼다. 가능하면 매년 이주노동자들의 본국을 방문해서 귀국한 조합원, 이주노조 전 활동가 등을 만나서 지속적인 교류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고 올해는 방글라데시에 방문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32살에 노동조합 활동 6년차에 들어섰다. 여전히 영어실력은 기초수준을 맴돌고 있고, 이주노조의 재정이 열악해 매년 후원주점을 해야 하며, 정부의 인종차별적 이주노동자 제도 개악은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다. 이 밖에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현실적인 조건으로 늘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주운동을 하는 것이 즐겁다. 이주운동을 하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대를 확장할 수 있는 회의, 술자리, 간담회 등 매순간이 운동의 발자취로 남기에 더욱 소중하다. 운동이 무언가를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면 무력감에 빠져있던 스스로를 바꾸어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힘을 주고 싶은 게 현재 내 운동의 가장 기본요소이다.

끝으로 오늘 소개할 노래는 스탑크랙다운 “우리가 원하는 건” 네팔 안나푸르나 올로케 뮤직비디오이다. 네팔에 갔을 때 해발 3210m의 푼힐에 올라서 안나푸르나 산맥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던 순간은, 그간의 스트레스와 고민을 눈 녹듯 사그라지게 만들었던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다야 이주노조 위원장님께 함께 불렀던 노래 영상을 띄우며, 오늘도 각지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는 모든 활동가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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