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 통치구조의 구성원리는 일반적으로 신임, 책임, 통제, 절제 등으로 설명된다. 전체주의나 독재와는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그래서 대의제는 형식적으로 권력분립의 원리를 적용한다. 그런데 권력분립이라는 형식의 발전 정도는 권력 간 사실적인 관계, 이른바 입법, 사법, 행정 등이 맺는 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여기서 국민 주권, 즉 권력에 대한 시민의 주권 실현의 문제가 제기된다. 민주주의의 내용적 측면으로, 대의제가 얼마나 성숙한가 여부는 권력의 분산과 사회적 합의에 조응하는 통치의 정도로 가늠된다. 권력의 분산과 사회적 합의의 과정에 시민사회가 얼마나 참여, 통제를 행사하느냐가 중요한 지표가 된다.

▲ 7일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고 있는 손병두 KBS이사장(오른쪽). 손 이사장은 수여식에서 “여야를 떠나 KBS가 BBC나 NHK처럼 국민의 신뢰를 받는 세계적 방송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대통령이 방통위원장을 임명하고, 방통위원회 전체회의는 KBS, MBC방문진, EBS 등 공영방송 이사를 선임한다. 공영방송 이사회는 사장을 선임하고 사장은 요직의 장들을 선임한다. 이처럼 한국의 공영방송은 구조적으로 정치권력과의 근친성에 노출되어 있다. 공영방송에 대한 시민사회의 참여는 극히 제한적이며 그나마 축소 지향적이다. 현재로서는 사실상 폐쇄적이다. 시민사회와 격리된 공영방송, 시민의 통제에서 자유로운 공영방송의 틀이 굳어지면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의 질적 추락은 피할 수 없다. 시민의 참여와 통제, 문제의 실마리를 여기서 풀지 않으면 공영방송의 정치 종속화 문제는 지속, 반복된다. 수신료 현실화에 대한 시민들의 냉소적 반응에서 확인되듯이 지금 공익적 책무, 방통융합시대 공적 가치의 실현 따위의 말은 허구, 허위에 가깝다.

가령 지난 7일 이명박 대통령이 KBS 이사 임명식을 하던 날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려 한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아무도 방송을 장악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대통령과 방통위원장이 공영방송의 사장과 방송의 체질을 바꾸고, 궁극적으로 ‘1국(관)영-다민영체제’로 재편하는 것을 곧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으로서 정치적, 정책적 책임을 다투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장악이 아니라 대통령과 방통위원장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바탕으로 집권여당의 방송정책을 관철한다는 이야기다.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 사멸 위기

KBS 정권 장악의 시작은 이사회의 인적 구성을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방통위와 학원이 신태섭 이사 정리를 공모했고, 정연주 사장 대신 이병순 사장을 자리에 앉혔다. 이병순 사장은 부사장, 센터장, 팀장을 선임하고 비판적 시사.보도프로그램 제작자들을 물갈이했다. 제작부서와 비제작부서를 번갈아가며 행해지던 순환근무의 원칙이나 기준은 무시됐고 전원 비제작부서 발령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YTN의 구본홍 전 사장의 사례도 그렇다. 이사회가 사원들의 요청에 부응해 사장후보추천위를 구성하기로 했지만 사전내정설과 부딪히고 말았다. 2008년 5월 29일 이사회는 구본홍 씨를 사장 후보로 결정했다. 이명박 캠프의 방송상임특보였고 인수위 대변인실 자문위원이었다. 구본홍 전 사장은 출근을 저지하고 반대해온 조합원 33명을 징계하고 경찰조사를 받게 하는 등 시종일관 분란의 원인이 되었다.

MBC ‘PD수첩’ 물고 늘어지기는 집요했다. 방송통신심의위, 검찰, 언론 등이 가세했다. 끊임없는 공정성 시비로 MBC 시사보도 편성,제작 주체들을 괴롭혔다. 방문진 이사에 뉴라이트 인사가 대거 등극했다. 엄기영 사장 해임 공세를 펴다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틈만 나면 MBC는 민영화해야 한다고 했다. 송출을 타 방송과 묶어 통째 민영화한다는 설도 있고 지역 MBC 광역화와 서울 MBC 지분의 케이블 매각설도 거론된다. 수신료 문제를 포함한 공영방송법(방송공사법) 제정이 MBC를 겨냥하고 있다는 지적과 맞물려 있다. 이처럼 MBC의 운명의 열쇠는 방문진 이사들이 쥐고 있고, 예의 방통위원회 전체회의가 방문진 이사 선임권을 행사했던 바다.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이 현재로서는 헌재에 묶여 있지만, 집권여당 대표의 말대로 헌재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시 국회를 소집해 처리하면 그만이다. 시기 문제일 뿐 한나라당이 종편 추진을 중단하지 않는 한 지상파 3개와 종편 1-3개의 경쟁체제가 구축된다.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다. ‘1국(관)영 다민영 체제’에 종편채널 도입까지 이뤄지면 방송은 시장이 좌지우지 하게 된다. 수신료 현실화를 바탕으로 KBS를 공영방송으로 제대로 키우겠다고 하지만 공영방송 KBS는 국(관)영 방송 즉 정치권력에 종속된 방송으로 변모하게 된다. 공영방송법(방송공사법)에 적시된 공영방송위원회는 방통위 전체회의가 그런 것처럼 정치권력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결론은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이 사멸된다는 것이다.

▲ 구본홍 YTN 사장ⓒ송선영

공영방송 사수 투쟁 성과가 작지는 않지만...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에 맞선 공영방송 주체들의 저항, 그러니까 KBS의 사원행동 등 양심적인 구성원들, YTN노조, MBC 구성원들의 싸움은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의 가치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형식적으로 독립된, 공익적, 공적 가치 실현의 주체로서의 공영방송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기 투합이 세 차례 총파업투쟁과 미디어행동, 100일행동 등과의 연대로 이어졌다. 투쟁의 성과는 작지 않다. KBS는 이병순 사장의 연임을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다. 연임을 하더라도 집행 누수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YTN은 구본홍 사장을 돌려세웠다. 배석규 사장이 등장했지만 완전한 장악은 어려워 보인다. MBC 경영진과 노조는 방문진 이사들의 사장 해임 초기 공세를 일단은 막아냈다. 공영방송을 사수하겠다는 구성원들과 방송의 인적, 구조적 재편을 거듭 시도하겠다는 정권과의 밀고당기는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은 분명 사멸 위기에 처해 있다. 미디어운동진영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지만 법제도적 변화를 막아내는 데 있어 힘 관계에 따른 한계는 분명하다. 가령 KBS, MBC방문진, EBS 등 공영방송 이사 선임을 앞두고 투명성과 민주성의 강화를 제기했다. 공영방송의 사장과 이사는 국민의 대표성과 선임과정의 투명성, 정파적 독립성, 방송의 전문성 등을 구비해야 한다는 방향과 이에 입각한 몇가지 방안을 제기했다. 한편으로는 참여정부 당시 그 방안들을 구체화하고 실현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도 지적됐다. 하지만 방통위원회는 대통령, 방통위원장의 권한에 기댄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유지한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말았다. KBS, MBC방문진, EBS 이사 선임은 관행대로 이루어졌고, 아무런 성과도 남지 않았다.

▲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신임 방문진 이사들의 모습.ⓒ송선영

공영방송 운영원리, 시민.시민사회의 참여.통제 방안 준비해야

이같은 조건에서 공영방송을 얼마나 사수해낼 수 있을까. 그러니까 공영방송 구성원들이 KBS 이병순 사장 연임 또는 후임 사장 선출 과정, 배석규 사장 체제의 안착, 방문진 이사들의 공세에 맞서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의 틀을 얼마나 유지해낼 수 있을까. 방송개혁운동의 성과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방송을 정치권력의 하부로 종속화하는 이명박 정부의 구상을 지연시키고 거부하는 물적 기반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중요한 싸움이다. 그런데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 힘이 곧 공영방송의 궁극적 발전, 즉 공적 가치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공영방송의 힘으로 형질전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공영방송에 대한 시민의 주권은 시청자, 수용자의 지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바꿔말하면 시민과 시민사회는 지금까지 공영방송에 대한 참여, 통제의 본격적인 주권 행사를 한 적이 없었다. 공영방송 사수투쟁의 일선에 나선 공영방송 주체들조차 시민과 시민사회는 공영방송 사수의 지원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공영방송 주체와 시민사회 공히 이 인식의 틀을 바꾸지 않는 한, 참여, 통제의 주권 행사의 법제도적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 한, 공영방송의 미래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준비하지 않으면 정권은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국민 주권, 즉 권력(공영방송)에 대한 시민의 주권 실현의 문제가 제기된다. 대의제(대의제 미디어)가 얼마나 성숙한가는 권력(공영방송)의 분산과 사회적 합의에 조응하는 통치 여부로 가늠된다. 아울러 시민사회가 권력(공영방송)에 얼마나 참여하고 또 통제하느냐가 중요한 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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