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이례적으로 EBS 사장후보의 조건을 밝혔다. 골자는 ‘정치적 고려 없이 식견, 추진력, 그리고 교육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CEO를 뽑겠다’는 것이었다. EBS의 구성원으로서 방통위원장의 선언은 비록 ‘클리셰’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반가웠다. 정치적 고려를 안 하겠다는 것만도 어딘가.

▲ 서울 도곡동 EBS 사옥 ⓒEBS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 14명이 지원했다는 공모에서 본선에 오른 5명의 면접과정이 마침내 공개되었다. 면접과정 공개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동안 공개된 적이 없었던 내밀한 과정을 공개하기로 한 표면적인 이유는 ‘선정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5명 후보자들에 대한 여론의 검증을 받아보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1차적인 여론의 검증은 기자실에서 CCTV를 본 기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기자의 전언에 의하면 후보자들의 수준이 한마디로 실망스러웠고 EBS의 앞날이 실로 걱정스러웠다고 했다. 후보자들의 발언은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저급했다. EBS에 황당한 다큐가 많아 대폭 축소 및 폐지하겠다는 후보, 교양 문화 음악 프로그램을 폐지한 돈으로 교육콘텐츠를 강화하겠다는 후보, 독립공사화 후에 독자성이 강화돼 교육부에서 불만이 높았다는 후보 등 망언에 가까운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종면접이 도대체 어떤 자리인가. 나름대로 오랫동안 학습하고 가다듬은 ‘인식의 정수’가 촌철살인의 말이 되어 듣는 이의 가슴에 와 닿는 최후의 승부처가 바로 그 시간이다. 헌데 그 말들이 정녕 실언이 아니라 EBS의 사장이 되려는 사람들의 소신이고 철학이기에 듣는 이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방통위원장이 선언한 식견과 추진력과 애정의 정체인가.

솔직히 아주 조금은 본선에 오른 사람들의 ‘용쟁호투’를 기대했다. 그런데 본선 최종면접에서 여전히 부적격자를 골라낼 수밖에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그리 많이 필요하진 않았다. 게다가 임기 말까지 사교육비 20%를 감축하는데 앞장서겠노라고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후보들을 보면서 서글픔은 극치에 달했다. 올해 EBS의 사교육비 예상 절감액은 8000억 원 정도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EBS가 사교육비 절감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100억 남짓한 수능프로그램 제작비로 8000억 절감이라니...대하드라마 제작비만도 못한 돈으로 수천수만 편의 칠판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하고 있는 EBS 구성원의 희생이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성과다. 수능프로그램의 질적 문제로 여론의 질타를 받을 때마다 EBS는 참으로 바보같이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고만 했지 터무니없는 제작비 현실을 탓하지 않았다.

글로벌시대, 지식정보사회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여 고품격의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곳이 바로 교육방송이다. EBS PD들이 칠판방송을 안 하려고 해서 교양다큐만 한다고 어느 면접관이 묻고 어느 후보자가 답했다지만, 칠판방송은 안하려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더 이상 해서는 안되는 게 바로 칠판방송이다.

시청자들이 원치 않고 시대에도 한참 뒤떨어진 콘텐츠를 만드는 게 이 시대 교육방송 PD의 사명은 분명 아니다.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하루가 멀다하고 높아져가고,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육의 영역도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고 있다.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사로잡는 수준 높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매일같이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는 EBS 구성원들에게 희망을 주진 못할지라도 처절할 만큼 치열하게 이뤄온 EBS의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사람은 절대 EBS에 와선 안 될 것이다. 이것이 EBS의 시청자들이 EBS에 부여한 작금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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