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따라 처음 갔던 광주 무등경기장, 기억이 맞다면 해태의 선발은 김정수였고 상대팀은 롯데였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는 아주 기본적인 야구의 상식-4번 타자가 제일 잘 치는 타자라는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다. 9회초 롯데의 공격이 끝난 시점의 점수는 7대2. 경기가 그대로 끝났다면, 야구의 첫인상은 ‘약간 지루한 공놀이’였을지 모른다. 아웃카운트 3개가 남아있는 상황. 상대팀 투수가 전성기의 선동열이나 오승환이 아니라도 뒤집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고 소년은 ‘타임아웃 없는 경기’의 매력을 어설프게나마 알게 되었다.

나의 프로야구는 1993년에 시작되었다. 야구의 매력에는 진작에 빠졌으나 마음을 빼앗길 선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했던 그 해, 그 시즌의 지배자는 시범경기와 페넌트레이스 한국시리즈를 모두 석권한 해태였고, 훗날 팬들에게 전설로 기억될 이름들(이종범, 양준혁, 이상훈, 구대성)이 앳된 얼굴을 처음 드러냈다. 당연하게도 나는 중학교 내내 조선왕조 왕의 계보보다는 해태의 라인업을 더 잘외웠고, 수학시험 점수보다는 이종범의 도루개수가 더 높기를 바랐다. 한 번은 같은 아파트에 문희수가 살고 있던 덕에 엘레버이터에서 문희수와 이강철을 만나고는 심장이 멎을 번 한 적도 있었다. 그 시절 이종범은 나와 내 친구들의 우상이었다.

▲ 이대진 ⓒKIA 타이거즈

화려하고 날렵했던 이종범에 비해 이대진은 조금 묵직했고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다. 다부지고 단단한 체격도 순박해 보이는 얼굴로 인해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싸움하나는 잘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즐기지는 않는, 평소에는 순하면서도 속으로 단단해 보이는 그런 느낌이었다. 시범경기까지만 하더라도 스포츠 신문에는 ‘대형신인 양준혁 호된 신고식’, ‘이상훈, 김홍집, 노장진 신인 강속구 경쟁’ 같은 기사들은 넘쳤지 아무도 이대진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고교시절 21개의 홈런을 때렸을 정도로 강타자였지만 진흥고가 약체였던 탓에 전국에서 주목받지는 못했고, 프로입단하고 나서야 김응룡 감독의 권유로 투수로 나섰으니 주목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대진의 첫 무대는 93년 LG와의 개막전이었다. 이순철과 이종범이 나란히 5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던 해태는 김상훈과 이병훈이 맹활약한 LG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마지막 9회 위기의 순간에서 김응룡감독은 이대진을 올렸다. 고졸신인이 1군 마운드만 서도 긴장된다고 하는데, 개막전에, 그것도 자신의 공 하나가 경기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것은 투수로 전향한지 얼마 안되는 고졸신인에게는 버거운 부담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날 해태는 5대4로 패배하고 이대진은 패전투수가 되었다. 믿고 있는 신인들을 강하게 키우는 명장의 뚝심 덕분이었을까? 이대진은 시즌 내내 신인답지 않은 강한 뚝심과 묵직한 직구를 앞세워 3.11의 방어율에 10승을 올리는 활약을 펼쳤다.

에이스 중의 에이스

요새 같으면 따놓고 신인왕 받을 성적이었겠지만, 이대진은 2점대 방어율에 14승을 기록한 박충식과 마무리로 선동열을 위협했던 김경원에게 성적에서 밀렸다. 혹은 소속팀이 약체였다면 돋보이는 기록이었겠지만 천하의 이종범도 “니가 이종범이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워낙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많은 해태라서 어지간한 성적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정도였다. 게다가 93년의 해태는 10승 투수 6명을 배출한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서 최고로 손꼽히는 최강의 마운드였다. 다승왕 조계현, 구원왕 선동열, 핵잠수함 이강철, 가을까치 김정수, 원조 마당쇠 송유석 등의 선배들 앞에서 이대진의 성적은 신인으로서 준수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수준은 아니었다.

이대진의 별명은 ‘Ace of ace'다. 조계현도 이강철도 얻지 못했던 타이거즈의 에이스, 그리고 동시대의 정민태, 정민철, 이상훈 등 에이스들과 맞대결하면서 얻은 별명, 에이스 중의 에이스가 바로 이대진이었다. 이대진의 가장 화려했던 96~97시즌은 소속팀 해태로서는 위기의 시즌이기도 했다. 해태왕조를 이끌어오던 투타의 핵심 선동열과 김성한이 떠나고, 이순철, 장채근, 조계현, 이강철 등도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2년 연속 우승을 이끌어낸 것은 물론 20승 투수와도 안바꾸는 이종범 때문이었지만, 마운드 위에서 에이스가 무엇인지를 묵직하게 보여준 이대진이 없었다면 불가능 한 일이었다.

90년대 최고의 투수를 논하자면 분명 이대진은 꾸준함의 정민철이나 임팩트의 정민태에게 밀린다. 하지만 에이스는 단순히 기록이 좋은 투수가 아니다. 아무리 승수가 많아도 아무리 방어율이 낮아도 에이스의 칭호는 아무나 얻을 수 없다. 이겨야 할 경기는 반드시 이기는 투수. 타자들이 분발해주면 살살 던지면 실점을 하더라도 박빙의 순간에는 최고의 기량을 짜내며 과연 이 투수에게 점수를 뽑는 것이 가능할지 의심이 드는 투수가 에이스다. 상대편 투수와 타자들이 누가 나오든 한국시리즈 1차전을 믿고 맡길 수 있는 투수가 바로 이대진이었다. 그렇게 팬들과 동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는 97년 20승 투수 김현욱을 누르고 골든글러브를 거머쥐었다.

화려했던 동기생들과 기라성같던 선배들에 가려진 채 묵묵히 제 몫을 해내던 우직한 얼굴의 투수는 이제 리그 정상급의 에이스가 되었다. 고졸출신의 어린나이를 감안한다면 앞으로 최소 10년은 한국프로야구를 호령할 것만 같았다. 막강 현대 타선을 상대로 10타자 연속삼진을 이뤄냈을 때는 모든 기대가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때로 신은 가장 노력하는 자에게 가장 큰 시련을 내려준다. 이종범이 떠나버린 해태에서 그는 혼자남아 고군분투 하지만 그것이 독이 되었는지 부상으로 주저앉게 된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6년 동안 76승을 올린 투수가 나머지 24을 채워 100승 투수가 되는데 십년이 넘는 세월이 걸릴지. 야구선수치고 부상한 번 안당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수술받고 한 시즌 쉬면 예전같은 불같은 강속구를 뿌릴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도, 팬들도, 아마도 이대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젊은 나이의 혈기왕성함 때문이었을까? 성급하게 복귀했던 2000년, 해태는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고, 아직 성하지 않은 어깨로 선수생명을 불살라가며 강속구를 던진 대가는 혹독했다. 이제 다 지난일이지만, 이대진이 마운드가 아닌 곳에서 한발 짝 떨어져서 그라운드를 바라볼 여유가 조금만 있었다면 해태의 암흑기가 그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은 한국야구의 투수운영 시스템이나 재활시스템이 지금 수준정도만 되었어도 이대진의 100승은 훨씬 당겨졌을 것이다. 다 부질없는 가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쓰러져간 에이스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주형광, 염종석, 김상엽, 김상진... 너무 일찍 피었다가 빨리 떨어졌던 꽃들. 이대진도 그들의 전철을 밟는다고 생각했다. 이대진의 자랑이었던 낙차 큰 커브처럼 정상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나긴 재활의 시간동안 나는 이대진보다 먼저 포기하고 있었다. 100승은커녕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이대진 ⓒKIA 타이거즈
이종범이 팬들을 웃게하고 열광하게 하는 선수였다면 이대진은 팬을 눈물짓게 하는 선수다. 해매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이대진의 복귀여부를 가늠하는 기사가 실렸지만 더 이상 아무 기대도 갖지 않았다. 이제 다시는 선수로 볼 수 없을 것 같던 이대진을 내치지 않는 구단이 고맙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대진이 타자로 전향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왔다. 고교시절 강타자로 날렸던 이대진이었지만 이미 10년 넘게 놓아버린 방망이가 신통할 리가 없었다. 역시나 연일 투수들의 강속구에 맥없이 물러나기 일쑤였다. 강속구을 잃어버린 그가 타석에서 맞이했던 다른 투수들의 강속구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8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던 그가 뽑아낸 첫 안타는 그의 인생만큼이나 극적이었다. 2002년 잠실구장, 자신의 데뷔전 상대였던 LG와의 경기에서 7회초 1사만루의 찬스에서 이대진은 대타로 등장한다. 상대투수는 한국 최고의 마무리이자 이대진의 입단동기 이상훈, 점수는 5대4로 기아가 뒤지고 있었다. 2스트라이크 2볼에서 이상훈은 바깥쪽 빠른공을 승부구로 던졌다. 공 하나 하나에 혼을 실어 던지던 이상훈, 그리고 이대진의 스윙이 호쾌하게 이어졌다. 잠시동안 시간은 멈춘 듯 했고, 관중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공은 중견수 이병규를 훌쩍 넘겼다. 헌데 왠일인지 역전의 기쁨보다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속구가 사라진 후 오히려 '투수'가 되다

타자로서 외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대진이 내려온 곳은 마운드였으니 다시 돌아갈 곳도 마운드였다. 2004년, 2005년, 2006년 이대진은 한 시즌에 한 두 번씩은 마운드에 올랐으나 안타까움만 남기고 쓸쓸히 퇴장했다. 아무도 이대진의 재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 외롭고 고독한 재활 끝에 그는 돌아왔다. 병역거부로 구속중이던 나는 2007년 수원구치소의 차디찬 독방에서 이대진의 복귀경기를 봤다. 수감시설 안에서는 모든 방송이 녹화방송이었기 때문에 나는 징벌을 무릅쓰고 TV안테나를 조작해 이대진의 경기를 지켜봤다. 주파수를 잘 맞추지 못해 지지직거리는 화면으로 7년만의 선발승을 끝까지 지켜봤다. 100승 따위는 생각도 안했다. 다시 돌아와서 마운드에게 제몫을 하는 선발 투수로 던져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2007시즌 꼴지팀 기아에서 7승을 거두며 무너진 선발진에서 불운의 에이스 윤석민과 함께 당당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예전의 불같은 강속구는 사라졌지만, 타자들을 압도하는 포스는 없어졌지만, 마운드 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눈물나게 하는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WBC에 출전했던 김민재는 언젠가 오승환의 돌직구을 언급하며 도저히 칠 수 없을 것 같지만, 전성기 이대진의 속구에는 못미친다고 했다. 잘 받아쳐도 손이 저릿저릿한 강속구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이대진은 ‘투수’가 되었다. ‘투수’의 의미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공을 던지는 사람, 투수 이대진에게 100승은 오히려 덤이다. 승패와 탈삼진 같은 성적은 이대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엔 너무 볼품없다. 그는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는 자체가 의미가 되는 사람이다. 기아가 올 시즌 우승하면 좋겠지만 그런 따위도 상관없다. 이대진이 마운드 위에 오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야구를 보며 눈물 흘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투수 이대진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프로야구는 93년 이종범과 함께 시작되었다. 내 프로야구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이대진과 함께 끝난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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