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을 보면서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이라크, 이란, 수단, 소말리아, 리비아, 예멘 등 7개국 출신 이민자들에 대한 비자발급 등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이후 미국 사회가 두 동강이 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연상케 한다.

오바마 정권 인사인 샐리 예이츠 국무장관 권한대행은 이 행정명령에 대해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가 ‘해고’됐다.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은 “시민들이 헌법적 권리를 행사한 것은 미국의 가치가 위태로워졌음을 보여준다”, “신념과 종교를 이유로 개인을 차별한다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 취임 일주일 만에 현 정권과 전 정권이 정면충돌하는 양상은 세계 정치권에서도 드문 케이스다.

사태가 이렇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원론적 차원에서 위의 7개국 출신인 사람들 모두가 테러와 연관됐다고 보기 힘들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9·11 이후 미국 내에서 일어난 테러 중 외국에서 입국을 해 일어난 케이스는 없다. ‘사전예방’적 차원을 고려하더라도 최근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테러의 중심으로 평가받는 이슬람국가(IS)가 수니파 원리주의자들임을 고려할 때, 이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비자 발급 제한 대상에서 빠졌다는 점도 의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미국 언론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비즈니스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기업가로서 거래 상대였던 국가들은 제외한 결과라는 거다.

이런 비판을 자초하면서까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기성언론은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의 존재를 주목한다. 뉴욕타임스는 스티브 배넌을 필두로 한 소수의 측근그룹이 이번 행정명령 강행을 주도했다고 전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신임을 독점하고 있는 스티브 배넌을 사실상 대통령이나 다름이 없는 지위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스티브 배넌은 극우매체인 브레이트바트뉴스의 공동창업자 출신으로 이 매체를 통해 이민반대, 유대인 및 무슬림 반대 등을 표방해왔다. 이들은 스스로를 ‘대안 우파’로 부르며 일련의 미국판 극우정치운동을 주도해왔다. 또다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스티브 배넌을 위시한 백악관 강경파들은 이번 행정명령에 더해 그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공약하거나 공언해온 일련의 비합리적 조치들을 한꺼번에 행정명령으로 처리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적 온건파로 공화당 전국위 의장 출신인 라인스 프리버스 백악관 비서실장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 측이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피력해 7개국에 대한 비자발급 제한이라는 단일 사안에 대한 행정명령을 처리하는 것에 그쳤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이런 맥락을 보면 이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 ‘대안우파’라는 사람들이 가진 세계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대안우파’의 ‘대안’이라는 단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과 관련해서도 ‘대안 사실’이라는 형태로 언급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거 불참한 사태를 언론이 보도하자, 백악관이 ‘대안 사실’을 제시하겠다며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취임식에 몰렸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말이 ‘대안 사실’이지 사실상 권력이 보도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어쨌든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미국 극우정치세력이 ‘대안’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다. ‘대안 우파’들의 세계관으로 볼 때, 기성 정치와 언론은 늘상 사람들을 속인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 사실’을 제시해 이러한 속임수를 폭로하고 해체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탄생 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을 두고 시종일관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멈추지 않았던 게 대표적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는 기성 정치권과 언론이 어떤 그럴듯한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거짓말들일 뿐이다. 따라서 다소 흠이 있더라도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 이게 ‘대안 우파’들의 2016년 대선을 대하는 핵심 논리 중 하나였다.

이렇게 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다소 무리수가 있는 행정명령을 강행한 이유에 대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대안 우파’들의 냉소적 인식에서 정치인들은 선거 기간에 오로지 ‘당선’이라는 사적이익 추구를 위해 ‘공약’이라는 명분을 거짓으로 남발한다. 따라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거짓말쟁이’들의 일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공약한 사안을 실제로 집행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비합리적 공약을 실제로 이행할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런 행위를 반복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역시 정직한 사람이었다’며 박수를 칠 것이다. 그러나 기성 정치권과 언론은 트럼프 행정부의 비합리적 정책 집행에 경악하며 비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심지어 집권당인 공화당도 빠질 수 없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행정명령 서명에 대해 공화당 소속 의원들도 반발하고 있다. 오히려 테러리즘에 명분을 주고 국내의 ‘잠재적 테러분자’들을 활성화 시킬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대안 우파’의 눈으로 보면 기성 정치의 이런 대응은 결국 ‘적’에게 굴복하는 행위일 뿐이다. 대선 기간 동안 불거진 ‘이메일 스캔들’에 그의 측근인 후마 애버딘이 연루돼있다는 이유로 힐러리 클린턴을 향해 “적과 내통했다”는 비난을 퍼부은 것도 마찬가지 논리였다. 후마 애버딘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다. 즉, 이 논리로 보면 전 대통령의 배우자이기도 한 힐러리 클린턴은 ‘스파이’이거나 최소한 스파이에게 이용당한 사람이 되는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주필이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 '정규재 TV'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규재 TV/연합뉴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가 국내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과 법적 대리인들, 그의 충실한 지지자들은 연일 비합리적 인식에 근거한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국면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혹은 정치적 야망을 가진 JTBC 등 일부 언론 등에 의해 음모적으로 조성되었다는 게 그것이다.

이러한 음모론의 발원지로 극우적 ‘대안 매체’ 및 이의 관계자들이 등장하는 것도 비슷하다. ‘정규재TV’를 운영하는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은 ‘극우논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과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종북’으로 공격한다. ‘종북’이라는 것은 ‘거짓말쟁이’라는 뜻도 된다. 마음은 공산주의자이면서 아닌 척 하며 북한 정권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극우세력을 비판하기 위해 ‘파시즘’의 개념을 인용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파시즘의 씨앗은 바로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다. 기성의 체제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사익 추구만을 위해 동작한다는 믿음의 확산과 그 믿음을 활용해 현안에 대한 파국적 해결방식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의 등장이 시작이다. 이 ‘파국적 해결방식’이 특정 민족이나 계층, 특히 사회적 소수자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파시즘은 현실이 된다. 지금 한국 사회가 이러한 수순으로 가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를 부추기는 게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권력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더 큰 절망을 느끼게 된다. 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이 답을 찾는 게 대안적 정치의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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