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일이다.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이 ‘정규재TV’와 인터뷰를 통해 자신에 대한 모든 의혹이 ‘음모’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애국시민’의 태극기 시위가 촛불집회를 능가하고 있다며 일말의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탄핵 심판에 있어서 대통령 대리인단의 행태와 최순실 씨의 특검 출석 해프닝을 묶어서 보면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인터뷰에서 탄핵과 특검 수사 등에 대해 “그동안 쭉 진행 과정을 추적해보고 보면 뭔가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고 발언했다. 기획자가 누구일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엔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 그렇다. 하여튼 이것은 우발적으로 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은 갖고 있다”고 했다. 최순실 씨와의 ‘경제공동체설’이나 ‘국정농단 의혹’에 대해서는 모두 황당한 이야기라고 했고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최순실 씨의 개입이나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선 모른다고도 했다. 일부 문화체육관광부 인사에 최순실 씨가 개입했다는 점 외에는 드러난 혐의를 거의 인정한 게 사실상 없고 모든 걸 ‘특정 세력의 음모’로 규정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이런 황당한 메시지를 내놓은 이유는 결국 명절을 앞두고 자기 지지층에 호소하기 위한 전략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억울하다’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전파할 당사자는 보수적인 노년 유권자층일 것이다. 이들이 명절 밥상머리에서 “너희들이 진실을 아느냐”며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을 그대로 반복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찔한 느낌까지 든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주필이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 '정규재 TV'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규재 TV 캡처/연합뉴스)

최순실 씨가 특검에 출석하면서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특검이 아니다”라며 억울하다고 호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순실 씨 측은 특검 수사가 강압적이라는 취지의 기자회견을 26일 진행했다. 지난해 12월 24일 1차 소환조사에서 박영수 특검팀이 “피고인의 죄는 죄대로 받게 할 것이고, 삼족을 멸하고, 모든 가족을 파멸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딸 정유라는 물론이고 손자까지 감옥에 가게 될 것이며 대대손손 이 땅에서 얼굴을 못 들게 하고 죄를 묻고, 죄인으로 살게 할 것이다”, “박 대통령과 모든 면에서 공동체라는 걸 자백하라”는 등의 발언을 하며 압박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도 최순실 씨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특검은 편향돼있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인데, 박근혜 대통령의 ‘음모론’적 메시지의 재료가 될 수 있는 언동임에는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25일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대리인단의 주장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날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은 자기 임기 내에 탄핵심판을 완료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면서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일인 3월 13일 이전까지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 대리인단은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장인 바른정당 권성동 의원이 언론을 통해 3월 9일 선고를 언급했다며 일종의 ‘내통설’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이들은 대리인단 일괄사퇴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언론은 이를 명백한 ‘지연전략’으로 판단하고 있다. 법률가들은 법정 대리인 없이 헌법재판소 심판 절차를 진행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 해석이지만 탄핵 심판의 경우에도 그러한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절차를 논의해 정해야 하는데,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퇴임 이후 대통령 대리인단 측이 물러나게 되면 문제가 커진다. 헌법재판소장 없이 결정한 탄핵심판 일정에 대해 대통령 측이 이의를 제기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대통령 대리인단이 주장하는 것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총리가 헌법재판소장을 새로 임명하고 대법원이 이정미 재판관의 후임을 추천하면 된다는 것인데, 황교안 총리의 권한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큰데다 인사청문회 및 국회 표결 절차까지 감안하면 쉽지 않은 길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 측에서 볼 때 ‘야당의 발목잡기’가 될 것이다. 결국 논란을 키우고, 탄핵심판 일정은 미루고, 현재 헌법재판소의 태도에 대해선 ‘편향’ 의혹을 제기해보겠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이 하나의 ‘스토리’로 가공되면 어마어마한 얘기가 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기획한 배후세력이 검찰, 특검, 헌법재판소, 국회를 장악하고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편향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이 인터넷 등에서 무책임한 덧글로 표출되는 게 아니라 대통령과 이를 대리하는 법률가들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다는 건 그야말로 경악할만한 일이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언급으로 조기대선 일정은 4월 말이나 5월 초가 될 확률이 커졌다. 정치권은 특검 기한의 연장을 검토하고 있는데, 2월 28일까지로 정해진 특검 기한이 3월 말로 연장되고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언급대로 3월 13일 이전 탄핵이 인용 결정되는 경우 박근혜 대통령은 ‘자연인’ 신분이 돼 구속수사를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알 수 없는 배후가 주도한 음모’에 의해 대통령이 구속되면 그 다음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음모론에 경도된 보수층이 거리에 나설 것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 조기대선에 강경보수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후보를 내야 한다는 여론도 확대될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친박계 일각에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를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고 한다. 만일 황교안 총리가 스스로 결심을 한다면 강경해진 보수층 여론을 타고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황교안 총리가 결단을 하지 못한다면, 예를 들어 김진태 의원이라도 나설 것이다.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문 앞에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대회' 주최로 열린 태극기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담긴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즉, 이 사건의 모든 배후에 불순한 세력이 있는 것으로 믿는 망상적 세계관의 소유자들이 정치세력화 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지금 이들은 그간 권력의 입장을 대변해왔던 보수언론도 믿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기성 매체가 아니라 굳이 ‘정규재TV’와 인터뷰를 한 것 역시 이를 방증한다. 기성의 질서에서 완전히 유리돼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바로 이런 흐름이 도널드 트럼프라는 정치적 파국을 만들어 냈다.

경향신문과 뉴시스, 동아일보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최근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하는 이들은 박근혜 정부가 관리한 ‘화이트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인사들이다. 이들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 시절 청와대와 직접 소통에 장외여론을 형성하며 그 대가로 전경련을 통한 재정지원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박근혜 대통령 측의 움직임은 정치적 파국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거나 창출하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는 셈이다. 현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성의 질서를 뒤엎겠다는 이런 시도를 과연 ‘쿠데타’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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