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박기영 기자] ‘내가 사장이란 마음가짐으로!’, 한때 유행했던 캐치프레이즈다. 회사이익에 비해 겸손한 월급이지만 종업원 자신의 근로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종의 ‘최면’이 필요하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런 ‘최면’이 소용없는 근로자들이 있다. 그들은 종업원이자 사장인 택배기사들이다.

(사진=택배노조)

명절이 다가오면 택배기사들의 하루는 쉴 새 없이 바빠진다. 업체별로 차이는 있지만 평소의 1.5배에 달하는 물량을 처리해야 하는 곳도 있다. 명절은 택배업계에는 1년에 두 번 밖에 없는 ‘대목’이다. 관련 업계는 ‘설 대목’을 설 연휴 전 2-3주 정도로 보고 있다.

택배기사들이 설 배송으로 한참 바쁜 와중에도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알리기 위해 나섰다. 지난 24일,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택배노조)과 참여연대 등은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택배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 및 실태 고발 기자회견’을 열었다. 택배노조는 지난 8일 출범한 조직으로, 사실상 근로자임에도 대다수가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이로 인한 택배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들은 지난 18일부터 23일까지 6일에 걸쳐 택배회사 소속 기사 37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에 참가한 기사들은 CJ대한통운, 한진, 롯데, 로젠, KG 등에 속해 있다.

설문에 응한 기사의 절반 이상(58%)은 아무 잘못없이 고객에게 욕설을 들은 경험이 있었고, 대다수(75.5%)가 혹한·혹서기에 선풍기나 난로 없이 근무했다. 5명 중 1명(20.2%)은 지붕이 없어 비나 눈을 그대로 맞으며 분류작업을 했다.

이들의 상당수는 개인사업자로, 따지고 보면 엄연한 ‘사장’이다. 하지만 이들은 거래처에 가서 눈·비를 맞으며 물건을 떼어오고 경우에 따라서는 모욕을 당한다. 이들을 ‘사장’으로 대우해주는 ‘거래처’는 어디에도 없다. 국내 택배회사는 20여곳에 불과하지만 ‘무늬만’ 사장이 수백·수천명에 달하는 셈이다.

택배기사 임 모씨(45)는 “개인사업자라고는 하지만 사장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일이 고되거나 고객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욕설을 들으면 그만둘 생각이 절로 난다. 하지만 계약 당시 탑차(택배 배송에 이용되는 차량)를 ‘끼워 팔기’ 당해 탑차값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만둘 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택배기사들은 수입만 놓고 보면 고소득 직종으로 보일 수 있다. 임 모씨가 밝힌 자신의 연수입은 5000만원 수준이다. 하지만 탑차의 할부금과 기름값만 빼도 절반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진다. 과도한 근로시간도 문제다. 도로 사정이나 배송지에 따라 근무시간이 12시간도 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매일 운전을 해기 때문에 퇴근 후 술 한 잔조차 부담스럽다고 한다.

반면 ‘진짜 사장’들인 대형 택배회사의 등기이사들은 매년 2-5억원에 달하는 보수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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