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편안함, 편리함을 추구한다. 기꺼운 마음으로 종교적 고행에 나서는 구도자라면 모를까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늦은 밤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찾아가는 편의점(convinience store)은 밤을 새우며 일하는 그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의 창출이라는 신흥종교를 추종하는 경제학자들이 들으면 사치스러운 감상이라 할 소리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정당하게 비용을 지불하고 누리는 편익일 뿐이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 덕에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소위 감정노동자들이 당하는 ‘갑질’ 뒤에는 이런 인식이 깔려 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하는 노동경제학자 이상헌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는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는 책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다는 건 그 사람의 서비스를 사는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인간 자체를 사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고객은 왕이 아니고 자신이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는 소비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정형화된 과잉 친절을 직원에게 강요하는 기업을 거부하고, 조금 불편해질 것을 제안한다.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집단적으로 불편함을 감수하는 사회도 있다. 약간의 예외를 두고 있지만 유럽국가 대부분은 상점의 심야영업과 주말영업을 금지한다. 독일은 반세기도 더 전인 1956년에 상점영업시간제한법을 제정했다. 그 목적은 '근로자에게 건강, 여가, 수면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회적 활동을 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독일사회는 생활의 불편함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맞교환한 것이다.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이 더 값어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일은 사정이 낫지만 유럽국가들 대부분 높은 실업률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과문이지만 일자리 늘리기 위해 상점영업제한을 풀자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손 맞잡은 야권 대선 예비주자들 Ⓒ연합뉴스

민주주의는 매우 시끄럽고 비효율적인 정치시스템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파쇼 정권은 민주주의를 이렇게 공격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은 종종 정치 자체에 대한 부정과 혼용된다. '하는 일없이 쌈박질만 한다'는 박정희의 정당과 국회에 대한 비난은 유명하고, 프레임으로 고착되어 국민들 속에 반정치주의 또는 정치혐오란 후유증을 남겼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도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제도이다.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스의 고전적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시민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참여가 그만큼 값진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참여는 미덕이므로 참여를 확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편의성을 높이려고 참여를 가볍게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민주당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당헌당규강령정책위원회가 『19대대통령후보자선출규정』(안)을 발표했다. 발표문 전문에서 "정권교체를 위해 당원과 국민의 참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불편부당한 경선규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음을 밝힌다"고 했다. '참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후보선출규정의 핵심 취지임을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그 핵심 내용은 당원과 비당원으로 구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신청만 하면 경선투표 자격을 주는 완전국민경선이라는 것과 "순회투표, 투표소투표, ARS투표, 인터넷투표로 투표의 편의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ARS투표가 소위 모바일 투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략 2012년 대선의 후보자선출규정과 대동소이하다.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당헌당규강령정책위원장이 24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선규칙과 관련, "국민이 누구나 동등한 권한을 갖고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완전) 국민경선을 실시하기로 했다"며 "선거인단은 전화, 인터넷, 현장서류를 통해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완전국민경선도 정당정치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모바일 투표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편의성을 높여 참여를 확대하는 것과, 투표를 가볍게 만드는 것은 트레이드 오프(trade off) 관계다. 둘 중이 무엇이 더 중한가에 대한 판단은 많이 갈릴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와 권리, 나아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대선후보를 선택하는 마치 TV에서 진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출연자에게 문자투표를 하듯이 소파에 편안히 기대서 스마트폰으로 오는 음성안내에 따라 번호를 누르는 것으로 대체한다는 발상은 납득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와 참여하는 국민의 책임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짓이다. 이렇게 해서 참여가 확대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발전할까? 전자정보기술이 우리보다 뒤처지지 않은 정치선진국 가운데 단 한 나라도 모바일로 투표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인 평등선거와 비밀선거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점도 가벼이 볼 문제가 아니다. 발표문을 보면 비밀투표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고, 평등선거 문제에 대해서는 순회투표와 투표소 투표를 허용했으므로 모바일투표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방법으로 하면 된다고 하는 것 같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조건을 달리하는 것 자체가 평등선거 원칙에 위반된다.

검표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또 하나의 결정적 문제점이다. 경선결과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사후 논란에 대비한 검증이 가능해야 한다. 모바일투표는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감수하고 참여하라고 요구한다. 참여를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내리는 선택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 민주당의 후보선출규정은 너무 나갔다. 언제나 균형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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