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 간 대결대립이 시민 6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사태의 핵심은 시민이 죽었다는 사실이고, 사태의 본질은 두 개의 국가가 구조적으로 불특정한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죽음을 불렀다는 사실이다. 임진강의 비극 앞에 니탓내탓을 따지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운 일이다.

현재까지 언론에서 확인된 사실 관계는 이렇다.

6일 새벽 2시경 황강댐(또는 4월5일댐)에서 물 4000톤을 방류했다. 오전 5시경 26사단 전차부대가 대피를 시작했다. 오전 5시15분 연천소방서에 119 신고가 접수됐다. 오전 6시경 임진교 하류에서 야영중이던 시민 7명 중 5명이 불어난 물에 휩쓸렸다. 주민 대피를 위해 설치한 무인자동경보시스템은 하필이면 5일 밤 11시쯤에 갑자기 고장이 나 작동하지 않았다.

임진강 하류 모래섬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던 시민 7명, 비룡대교 근처에서 급류에 휩쓸린 시민 1명, 인근 하류에서 구조된 시민 19명 등이 죽임을 당하거나 죽임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이들은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 돌입해 목숨을 거는 일에 동원되는 군인도 아니다. 불특정한 시민들이다. 남과 북이라는 두 국가가 최소한의 시민의 안전조차 고려하지 않은 탓에 야영을 즐기던 불특정 시민 무리들이 사선을 넘나든 것이다. 북이 댐 방류를 통보만 했더라도, 남이 늑장 대응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결격사유가 명백하다. 남과 북은 여전히 함량미달의 ‘불량국가’들이다.

임진강은 남과 북을 가로질러 흐른다. 분단이 되기 이전부터, 분단 이후로도 유구히 흘러왔다. 체제로도, 국가권력으로도 북쪽의 임진강과 남쪽의 임진강을 나누지는 못한다. 북의 시민들은 북의 임진강을 끼고, 남의 시민들은 남의 임진강을 끼고 삶을 영위하고 자연을 누려왔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분단은 현실이고, 남북이 특정한 대결 대립의 국면에 돌입하면 자연조차 군사적 수단으로 악용됐던 바다. 평화의댐과 서울물바다의 기억은 분단사회를 사는 시민들로서는 피할 수 없는 공포였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 사이에 6.15선언과 10.4선언까지 발표되었건만, ‘물바다’의 공포가 임진강에서 재연됐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9월7일자 동아일보 1면

9월7일자 조선일보 1면

동아, 남한 대상으로 하는 물폭탄 규정

조선일보는 사설로 ‘댐 수문 연다 전화 한 통화 안 한 북’을 실었고, 중앙일보는 사설로 ‘임진강 날벼락 언제까지 두고볼 것인가’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사설로 ‘한밤중의 물 폭탄, 북은 민족 운운할 자격 없다’를 실었다. 경향신문은 사설로 ‘유감스러운 북한 임진강댐 방류’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북이 남한을 상대로 수공을 했다는 의심이 든다” “경기도가 이달 초 북에 10억 원어치의 옥수수 2500톤을 지원한데 대한 패륜적 응대다”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탄강댐 공사 지연을 탓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도 “북측에 정치.군사적 의도가 없었는지도 속단할 수 없다”며 ‘수공’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더욱이 1면에 ‘북 예고없는 물폭탄... 야영객 6명 실종’을 실은 동아일보와 ‘수공? 댐 보수?... 북 통보 없이 방류’를 실은 조선일보의 카피는 ‘물바다의 공포’를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은 사전 통보없이 댐 문을 연 북에 강도 높게 책임을 제기하는 차원의 논조를 폈다. 한겨레는 1면에 관련기사를 게재하지 않았고 사설로도 다루지 않았다.

북이 홍수 등으로 임진강 댐을 방류해 경기도 파주, 연천 일대에 물난리가 난 것은 2001, 2002, 2005, 2006년에 이어 다섯 번째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7월 남북경제협력추진위 회의에서 당해 홍수철 피해 대책으로 북 임진강 댐 방류계획을 남측에 통보하기로 했지만 그해에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중앙일보는 관련기사에서 댐 보수 목적, 예기치 않은 사고, 의도적 방류 등 세 가지 가능성을 짚었다. 어떤 경우이든 북으로서는 댐 방류로 영향을 받게 될 남에 방류 사실을 예고했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모든 잘못을 북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남북간 경제협력, 교류협력 사업의 대부분을 중단하거나 봉쇄해온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통보없는 댐 방류’를 초래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북한 책임 일색에서 못 벗어나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0.4 남북정상선언을 한 직후 NLL 논란이 사회적 이슈가 된 바 있다. NLL이 군사적전 금지선이냐 해상군사분계선이냐, 영토 개념이냐 안보개념이냐 등의 논란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NLL 등 군사문제를 군사적 방식이 아닌 경제적 공동 이익의 관점에서 접근했고, 따라서 NLL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청산해야 할 역사적 과제로 인식했다. 남북 정상이 합의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추진하자면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 하구 공동이용 등의 경제적 조치가 뒤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말하자면 경제로 군사 문제를 녹여내겠다는 거였는데, 정권이 바뀌자 이마저 없었던 일로 간주되는 실정이다.

NLL은 한국전쟁 이후 분단모순이 함축된 역사적 산물이었다. 그로 인해 남북 어민들이 숱한 직접적인 고통을 받았고, 남북 해군이 전투를 벌이다 희생됐다. 특히 1999년 연평해전과 2002년 서해교전에서는 모두 6명의 군인이 숨지고 26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NLL에 투영된 남북 분단 고착세력의 욕망 때문이었고, 분단 고착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해온 남과 북의 지배세력 일반의 이해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었다.

임진강 하류에서 야영하던 시민의 죽음 소식은 NLL의 비극 이상의 충격을 던져준다. 북이 아무 생각 없이 방류한 것인지, 기술적 문제로 방류한 것인지, 정치적 목적을 갖고 방류한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앞의 두 이유라면 황당한 일이고, 마지막 이유라면 천박하기 짝이없는 구시대적 작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한나라당은 논평에서 “인도적 지원에 대한 답이 결국 휴일 새벽을 이용한 불시 댐 방류로 남측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일방적인 재발방지를 요구했다. 이처럼 북을 대결대립과 봉쇄 대상으로 삼는 남의 입장이 계속되는 한 임진강의 비극은 구조적이고 상시적이 되며 얼마든지 재연될 수 있다. 시민사회는 공포의 내면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남과 북이 상호 간에 온전한 국가로 인정하고 분단과 대결을 지양하는 가운데 근대적 합리성을 획득하는 날이 언제쯤에나 오게 될까. 불특정한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임진강의 비극, 두 분단국가가 무고한 시민의 죽음 앞에 진정으로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런 소망을 구현하는 신문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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