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언론이 새로운 ‘타깃’을 찾은 모양이다.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을 둘러싼 전시 논란이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극단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가운데 이 사건은 정치공학적 맥락에서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보수언론이 규정하는 ‘대통령에 대한 성희롱’에 그치지 않는,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관한 훨씬 복잡한 맥락이 작용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보수세력은 이를 외면하고 오히려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기만적으로 활용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들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먼저 사건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눠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문제가 된 <더러운 잠>이란 작품 자체의 문제다. 둘째는 이 작품이 야당 소속 의원에 의해 국회 내에 전시됐다는 점이다. 셋째는 이 사건을 둘러싼 여러 정치공학적 맥락이다. 넷째는 보수세력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이상한 관점과 대응방식에 대한 문제이다.

25일 조선일보 사설

첫 번째 층위에 대한 규정이 쉽지 않다. 보수세력 일반이 지적하고 있는 이 작품의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나체를 묘사했다는 점’ 뿐이다. 조선일보는 25일 관련 사설에서 “여성 알몸을 정치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전체 여성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적었다. 중앙일보도 이날 사설에서 “여성 대통령을 상대로 이런 식의 성적 모욕을 안겨주며 조롱하는 건 풍자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같은 날 새누리당 김정재 의원은 CBS라디오와의 전화 연결에서 “대상이 누구든 여성 알몸, 나체를 전시하는 건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말살한 인격살인이다”, “이런 외설적인 그림으로 대통령을 풍자한 것은 한마디로 국격 훼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종류의 비판이 유효하려면 작품이 여성의 나체를 성적대상화 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야 한다. <더러운 잠>에서 묘사된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16세기에 활동한 화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묘사된 ‘비너스’ 나체를 기본으로 한다. 일단 소재가 ‘비너스’라는 점에서 여성의 나체를 성적대상화했다는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정도’를 따질 필요는 있다. 고래의 화가들이 ‘비너스’를 주요 소재로 삼는 현상이 남성중심적 인식의 역사에 기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의 누드사진이나 포르노그라피에 대통령 얼굴을 합성한 것과는 명백하게 다르다. 그런데 보수세력의 반응은 앞서 본 것처럼 마치 그런 정도의 일이 일어났다는 투다.

25일 중앙일보 사설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들은 <올랭피아>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설명을 내놓고 있다. <올랭피아>는 19세기 화가 마네가 16세기 작품인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비틀어 만든 작품이다. 마네가 ‘비너스’의 자리에 ‘매춘부 모델’을 배치해 ‘성녀’라는 신화적 여성성을 ‘창녀’라는 현실적 여성성(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당시는 19세기였다!)으로 대체하자 당대의 ‘신사’들은 이 예술적 도발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더러운 잠>은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국정농단과 세월호 참사라는 현대의 정치적 맥락을 덧붙임으로써 19세기에 <올랭피아>가 촉발했던 식의 논란을 재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작자가 ‘박근혜 권력’을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굳이 떠올린 것이 ‘비너스’에 대한 미술사적 맥락이었다는 점 자체가 ‘여성혐오’의 혐의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여성민우회 등의 지적은 이 대목에 기반하고 있다. 여성민우회는 이후 홈페이지 등을 통해 게재한 입장에서 “성별, 성적지향, 지역, 학력, 인종, 장애 등을 근거로 한 희화화, 패러디, 풍자‘예술’은 저열한 방식의 폭력”, “(논란의 이유는) 풍자를 빌미로 대통령 박근혜의 여성성을 소환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나체’가 문제가 아니라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맥락에 맞지 않는 ‘여성성’을 굳이 문제로 삼은 게 잘못됐다는 거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로지 ‘대통령의 나체’만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보수세력의 태도는 오히려 세상사에서 말하는 ‘성적엄숙주의’의 반복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논란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게 앞서 언급한 문제의 두 번째 층위다. 예술에서 보장되어야 할 ‘표현의 자유’가 모든 것에 대한 ‘면죄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회에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행위는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치는 표현의 자유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공동체의 합의를 이끌어 내고 이를 위한 공론장을 형성하는 게 역할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 논란은 예술작품과 표현의 자유 그 자체에 대한 원론적 쟁점을 논하는 것을 넘어서서 입법부와 행정부의 관계, 이를 바라보는 시민사회의 시선에 대한 입체적 성찰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풍자’가 국회에서 이뤄졌을 때 정치적 논란이 불거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즉, 모든 작품이 그렇게 될 운명을 갖고 있긴 하지만, 특히 전시된 장소가 국회라고 할 때 예술은 ‘정치’와 분리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전시에 참여한 작자들이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한 가지 관점으로만 사안을 해석하려 한다면 그건 협소한 시각이라는 지적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세 번째 층위의 문제, 즉 정치공학적 측면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문제가 이 정도 규모의 쟁점사항이 된 것은 결국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지지층’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표창원 의원은 이미 공직자 연령 제한의 제도화를 주장한 바 있다. 이는 ‘65세 이상 노인들은 공직을 맡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여기에 이번 논란을 묶어 본다면 기성 정치권의 시각에서 표창원 의원 한 사람이 고령층, 여성, 극단적인 논란을 원하지 않는 중도적 유권자층의 표를 모두 날려버릴 수 있다는 식의 평가도 가능하다. 문재인 전 대표가 사건 직후 페이스북을 통해 “작품은 예술가의 자유이고 존중돼야 하지만 그 작품이 국회에서 정치인의 주최로 전시된 것은 적절치 않았다”,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등의 비판을 내놓고 더불어민주당이 표창원 의원을 즉각적으로 윤리심판원에 회부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작용한 걸로 볼 수 있다. 현대정치와 ‘공학’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고려하면 보수세력 일반이 이번 사건에 대해 평소 별 관심도 없던 ‘여성혐오’ 문제까지 들먹이며 들고 일어난 것 역시 같은 판단에 의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한 보수단체 회원이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 주최로 열린 '곧, 바이! 展' 시국비판 풍자 전시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나체 상태로 풍자한 그림을 집어 던지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세력이 어떤 문제의 해결 방식을 그저 정략이나 공학의 수준에서만 판단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가 긍정적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기여했다면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 보수세력의 대응은 오히려 한국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즉, 앞서 언급한 네 번째 층위에 대한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의 극성 지지자들은 표창원 의원의 가족들에 대한 모욕에 나서고 있다. ‘너도 한 번 당해보라’는 식이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런 합성 이미지들의 대다수는 앞서 언급한 <더러운 잠> 만큼의 사회적 메시지나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도 않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성희롱’을 문제 삼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복수’를 감행하고 있는 식인데, 이들이 과연 애초에 ‘나체를 전시해 여성을 모욕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게 맞기는 한지 의심스럽다.

언론이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문제를 ‘너는 되고 왜 난 안 되느냐’ 식의 소박한 개념으로 뒤바꿔버린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전시 소식이 알려지자 당장 인터넷에는 표 의원 가족 얼굴과 누드 그림을 합성한 영상이 올라왔다. 표 의원은 이것도 표현의 자유라고 옹호할 것인가”라고 썼는데,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필요에 의해 시민의 의사가 근본적 차원에서 제한돼서는 안 된다는 취지이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일보의 이런 한심한 우문에 표창원 의원은 공인인 자신에 대한 행위는 얼마든지 괜찮지만 공인이 아닌 가족들에 대해서는 자제해달라는 ‘현답’을 내놓고 있다.

물론 이 ‘현답’에 대한 보수언론의 규정은 또 다르다. 중앙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경찰대 교수 출신인 표 의원의 ‘예술’ 논리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비겁하고 한심한 일”이라며 “여성과 함께 노인이야말로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 아닌가”라고 썼다. 박근혜 대통령을 ‘여성’으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노인’으로 표현하고 이들도 약자라고 하면 누가 동의하겠는가.

조선일보도 “지금 박 대통령은 국정 농단 책임으로 탄핵 심판대에 올라 있다. 한때의 권력이었으나 이제는 바닥에 쓰러져 아무나 밟고 지나가는 대상이 돼 있다”면서 “반면 민주당은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는 중이다. 모든 공무원이 눈치를 보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이 지나치면 큰 반작용을 불러 일으킨다”고 썼다. 직무가 정지됐으나 대통령은 아직 대통령이다. 체제에 의해 보장된 권력의 속성에 대한 문제를 ‘공무원이 더불어민주당의 눈치를 본다’는 정치적 현상으로 대체하는 논리적 오류다.

보수언론의 이런 행태는 결국 ‘쥐박이는 되고 노알라는 왜 안 되냐’는 식의 구태의연한 퇴행적 논의를 반복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이 해야 할 일은 ‘표현의 자유’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보장하려는 것인지를 따지고 사회가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도록 공론의 장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그런 원론적 의무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이 기회다’라는 정략적 태도만 있을 뿐이다. 언론이 공론조성의 의무를 계속 외면하면 우리 사회 전체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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