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의 연속이다. 지난 4월 주경복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대해 무려 7년치 이메일이 압수수색되었다고 하더니 6월에는 검찰이 피디수첩 작가의 사적인 이메일 내용을 공개하였다. 8월에는 국가정보원이 인터넷 회선을 통째로 감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지난주 목요일에는 경찰청 보안과가 실시간 인터넷 감시시스템을 발주했다는 사실이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다. 우리의 인터넷에서 사생활이 철저히 까발겨지고 있다.

▲ 경향신문 9월3일자 1면
아직도 ‘사생활’을 ‘연예인’의 것으로 생각하는가? 한국사회 프라이버시권 운동이 1996년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십년 넘게 그 언저리에서 지금까지 활동해 왔다. 그러나 그 짧지 않은 세월 동안에도 ‘프라이버시’라는 말은 ‘사생활’이라는 번역어 이상을 만나지 못해 왔다. 그리고 ‘사생활의 권리’는 감추어야 할 사생활이 있는 사람들의 권리라는 의미를 넘지 못하고 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과 같은 ‘공인’이 감추어야 할 애정사 정도의 의미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생활의 권리’는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정직하게 살기만 한다면야 사생활에서 떳떳치 못할 일이 없고, 어느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파악할 수 있는 훈훈한 공동체성은 사생활과 긴장을 이루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프라이버시권’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권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프라이버시권’은 분명 ‘사생활’에 대한 권리로 출발하였지만 작금의 시점에는 ‘누구의 사생활’이냐가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CCTV, 인터넷 메일, 인터넷 검색, 네트워크 구조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기술 문명의 발달은 사생활을 엿보는데도 눈부신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눈부신 감시 기술 앞에서 세계는 두 계급으로 갈려 왔다. 감시하는 계급과, 감시받는 계급. 국가와 국민, 사측과 노측, 기업과 소비자, 시민권자와 이주민, 남성과 여성, 간수와 죄수, 교사와 학생… 여기서 감시는 철저하게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위기에 처한 ‘사생활’은 엄밀히 말해 ‘감시받는 계급’의 사생활뿐이다. 그래서 최근 프라이버시권이 감시받는 계급들의 ‘반감시의 권리’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프라이버시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어떤 저명한 학자는 자신을 ‘프라이버시 전문가’가 아니라 ‘감시 전문가’로 불러달라고 요청한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702030445)

경찰청 보안과, 실시간 인터넷 감시 시스템까지 발주

정보인권 활동가로서 지난해와 올해는, 지금까지 벌어진 일만으로도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잠재적 우려가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실체화되었다고나 할까. 인터넷 실명제는 ‘악플 퇴치’라는 탈정치적 실용적 명분 속에 도입되었고, (실용적 목표에 조금이라도 도달했는지도 의문스럽지만) 정치적 비판의 자유와 소수자 표현의 자유를 옥죌 것이라는 주장은 큰 주목을 끌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정부가 인터넷 실명제의 정치적 경향성을 명백히 드러내 주었다.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6월 17일 이명박 대통령은 OECD 장관회의 개막연설에서 “인터넷은 독이 될 수 있다”고 발언하고 바로 그 다음날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그 발언을 받으며 ‘인터넷 실명제’ 본격 도입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인터넷 실명제 무한 확대’는 ‘사이버 모욕죄’와 더불어 2009년 정기국회에서 한나라당이 통과시키고자 하는 ‘43대 법안’에 포함되어 있다.(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정부발의안)

인터넷 사찰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난해 5월 27일 <한겨레21>에서 문화부 신재민 차관이 ‘인터넷 조기 대응반’을 설치하였다고 보도하고, 6월 16일 어청수 청장 휘하 경찰청이 ‘인터넷 전담 대응팀’을 전격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이것은 불길한 예감에 불과했다. 그러나 10월 6일 민주당 장세환 의원이 문화부에서 하루 두 차례씩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인터넷 댓글을 모니터링해 청와대·대검찰청·경찰청·방통위 등 42개 정부부처에 전달해 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사정기관 등에 보고된 누리꾼의 아이디 규모가 7~800개에 이른다고 했다. 10월 28일 <위클리경향> 보도에 따르면 다음 아고라나 네이버 블로그에서 경찰의 눈에 띄는 글을 올린 네티즌들의 신상 정보는 1시간 안에 그 ID, 가입 날짜, 최근 로그인 날짜, 이름(실명),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전화번호 등 상세한 사항이 경찰에 제공되어 왔다. 이번에 경찰이 구축한 실시간 인터넷 감시시스템, 즉 “사이버 검색·수집 시스템”은 이러한 사이버 순찰의 번거로움을 덜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부와 경찰만이 아니다. 국정원의 인터넷 회선 감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이메일 보내기와 받기는 물론, 웹서핑, 게시물 읽기와 쓰기, P2P 다운로드 등 감청 대상자의 모든 인터넷 이용 내용을 엿볼 수 있는 기술이 사용되었다. '패킷 감청'(정확하게는 심층 패킷 감시, Deep Packet Inspection)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인터넷 패킷을 이용자가 사용하는 회선에서 바로 가로채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국내 사이트와 구글 등 해외 사이트를 가리지 않는다. 국정원은 여기서 더 나아가 [국가사이버위기관리법] 제정안을 지난해 발의하고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아우르는 사이버 관리를 국정원이 주도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바 있다.

▲ ⓒblog.naver.com/jangbaeksan
국군기무사령부도 사이버 기무사령부 이야기를 꺼내들고 나섰다. 그런가 하면 ‘육군 사이버 순찰대’가 군에 비판적인 블로그에 게시물 삭제를 요청하고 다녀 물의를 빚고 있다.(http://blog.naver.com/jangbaeksan/50070728578)

자기 검열 극복한 평범한 사람의 반란 필요하다

정부, 경찰, 국정원, 군까지 총동원되어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물론 인터넷에 공개된 게시물에 대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대하여 딱히 못하게 할 방도는 없어 보인다. 그들은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 통상적인 직무라 주장할 것이고, 실제로도 인터넷 이메일 압수수색, 회선 감청은 적법한 영장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의 인터넷 여론 동향 파악이 기층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책적 결과물로 나타난다면 나쁘다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을 ‘반감시’의 인권감수성을 가지고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당신이 아고라에 올린 정부비판 글과 당신의 아이디가 42개 정부부처에 전달되었다면?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대통령 욕이 경찰의 검색시스템에 잡혔다면? 육군 순찰대에서 게시물을 내리라고 당신에게 쪽지를 보내온다면?

그것은 곧 ‘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게시물을 올린 당사자 뿐 아니라 그 당사자에게 닥친 일들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혹은 그 가능성만으로도 인터넷 여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우리는 위축되어 오지 않았던가? 지난해 사정당국이 미네르바의 신상정보를 흘리고, 그를 체포한 검찰이 그의 나이, 학력, 직업, 주소를 까발렸을 때, 수많은 게시물들이 ‘자진삭제’되었다. 이것은 직간접적으로 의도된 정치적 효과이다. 검찰이 PD수첩 김은희 작가가 대통령에 대해 싫은 감정을 드러낸 이메일을 공개한 것은 더욱 직접적이다. 당사자는 여론 재판을 받게 하고, 이 경악스런 사태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는 자신들도 대통령을 싫어하는 의사를 표현할 경우 감당할 정치적 부담을 가상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사찰’은 단순히 ‘조사하여 살피는’ 일이 아니다. 사찰은 ‘사상적인 동태를 조사하고 처리하는’ 직분을 의미하며,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인터넷 사찰이 이제 정보기관의 일상적인 업무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전 국민 인터넷 시대에 이는 매우 불행하고 위태로운 사태이다. 감시는, 감시하는 사람들이 의도하는 대로 사회를 통제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 감시 전문가들의 경고이다. 그들이 의도하는 것은 인터넷이, 그리고 전사회의 비판적인 의견들이 위축되는 것이다. 그 의도대로 되지 않으려면 평범한 사람들의 반란이 필요하다. 자기 검열을 극복하고 올라오는 글들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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