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검증’ 바람이 거세지면서 보수정치가 흔들리고 있다. ‘반기문’이라는 변수에 대선구도, 정계개편, 개헌방향 등이 모두 연동해놓았으나 지지율의 움직임이 신통치 않고 반기문 전 총장 일가를 둘러싼 의혹이 언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는 23일 1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 동안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252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유무선 혼용 방식,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2.0%p,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결과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29.1%, 반기문 전 총장은 19.8%의 지지를 획득한 걸로 나타났다. 문재인 전 대표는 분명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고 반기문 전 총장은 하락세가 완연하다.

이러한 흐름은 보수정치 전반에 당혹스러움을 선사하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의 귀국을 기점으로 ‘컨벤션 효과’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히려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기문 전 총장에 대한 신비감이 걷히는 시점에 불거져 나온 여러 ‘구설’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국제정세에 능통한 전문가를 기대했는데 ‘허술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형성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오로지 이런한 ‘구설’이라면 반기문 전 총장에게도 충분한 만회의 기회가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접촉하는 등 행보에 나선 것은 사소한 해프닝의 연속이 아니라 무게감 있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을 의도한 걸로 보인다. 보수언론은 반기문 전 총장이 진지한 행보에 나서기만 하면 언제든 호의적으로 포장해줄 준비가 돼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이 대선불출마를 선언한 오세훈 전 시장과의 접촉에 나서면서 바른정당으로의 입당 협의 역시도 속도감 있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새누리당 내의 반기문 전 총장 지지 세력의 움직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3일 새누리당 박순자 의원은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순자 의원은 반기문 전 총장이 팽목항을 방문했을 때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듯 행동한 인사이다. 즉 지금 상황에선 박순자 의원의 행보가 일종의 ‘신호탄’인 것이다.

언론은 박순자 의원의 탈당을 시작으로 새누리당 내 비박계의 2차 탈당이 설 연휴 전에 시작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탈당 가능성이 언급되는 현역 의원은 1차 탈당 직전까지 행보를 함께했던 강석호, 나경원, 심재철, 윤한홍 의원과 이철규, 정유섭, 홍철호 의원 등이다. 여기에 충청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현역 의원들 십 수 명의 탈당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지난 주 바른정당과 반기문 전 총장 측이 이른 바 ‘지분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는데, 새누리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당분간 외곽에 머무르다 반기문 전 총장과 바른정당에 집단 입당을 하는 시나리오가 작동되면 이 ‘지분협상’의 결론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행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치로 나타날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앞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각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 38.0%, 새누리당 12.5%, 국민의당 11.5%, 바른정당 8.9%, 정의당 4.9%로 나타났다. 만일 설을 앞두고 반기문 전 총장과 새누리당 탈당 세력이 사실상 바른정당에 입당하는 결론이 내려진다면 명절을 경유하면서 상당한 컨벤션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 해볼 수 있다. 만일 바른정당 지지율이 새누리당을 앞서게 되면 반기문 전 총장을 중심으로 한 대선구도는 지금과는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반기문 전 총장이 ‘보수정치의 대표주자’로서 입지를 분명히 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23일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새누리당 민경욱, 이만희, 최교일 등 초선의원들과 회동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하나의 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고비가 나온다는 게 반기문 전 총장이 처한 문제다. 당장 친인척 비리 형태의 의혹이 계속 불거지고 있다. 22일 미국 검찰이 반기문 전 총장의 동생인 반기상 전 경남기업 고문을 체포해 압송해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반기상 전 고문은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으나 이 문제가 반기문 전 총장의 정치적 행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언론 보도를 보면 사건의 골격은 매우 단순하다. 반기상 전 고문과 그의 아들인 반주현 씨가 경남기업이 베트남에 건설한 ‘랜드마크72’라는 빌딩을 카타르투자청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카타르 정부 관계자들에 대한 매수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반주현 씨가 브로커에게 이를 위한 자금을 건넸지만 ‘배달사고’ 덕에 실제 매수행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부자와 브로커가 반기문 전 총장의 이름을 활용해 유리한 거래를 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반기문 전 총장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항변하고 있지만 자살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반기문 전 총장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후원자를 자처했다는 점까지 같이 보면 명확한 해명이 필요한 사안임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친인척 비리가 이런 식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같은 일에 “나는 몰랐다”고 말하겠다는 태도는 있을 수 없다.

반기상 부자와 관련한 의혹보다 치명적이 될 수 있는 걸로 보이는 부분은 반기문 전 총장의 아들인 반우현 씨 관련 의혹이다. 반우현 씨는 2011년 SKT 뉴욕사무소에 특별채용됐다. SKT 뉴욕사무소는 2010년 4월 설립됐는데 그 해 11월 반기문 전 총장은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의 초청 방한 자리에서 최태원 회장을 만났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SKT는 반우현 씨를 위해 취업비자 보증을 서준 걸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신동아 2017년 2월호는 반우현 씨가 회사 일을 하지 않으면서 15만 달러(1억7000만원)에 이르는 연봉을 받고 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SK 측은 신동아 등 보도에 대해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 본인에 대한 것도 있다. 참여정부 시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23만달러를 수수했다는 의혹이 그것이다. 23일 반기문 전 총장 측 인사인 박민식 전 의원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반 전 총장의 금품수수 의혹에 대한 언론보도는 장소와 시간, 물증 면에서 단 한 가지도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며 “(박연차 회장 관련 의혹은) 유령들이 등장하는 소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박민식 전 의원은 반기문 전 총장의 당시 일기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박연차 전 회장이 “불순하고 무식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즉, 자신에게 돈을 준 사람을 일기에 부정적으로 묘사했겠느냐는 것이다. 박민식 전 의원은 또 반기문 전 총장의 일정표와 당시 사진 등을 근거로 행사 1시간 전 박연차 전 회장에게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은 사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도 제기된 의혹을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을 걸로 보인다. 박민식 전 의원이 제시한 일기장과 사진 등도 마찬가지로 정황증거에 불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확실한 해명을 위해서는 해당 의혹을 보도한 언론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해 사실관계를 따지는 게 필요해 보인다. 반기문 전 총장 측은 언론중재위에 제소를 했을 뿐 소송을 진행하지는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반기문 전 총장이 과연 대선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을 것인지조차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반기문 전 총창 측 인사인 이상일 전 의원은 YTN라디오와의 전화 연결에서 대선 포기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선 포기가 없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중도낙마’ 가능성이 끊임없이 회자되는 상황 속에서 ‘포스트-반기문’을 준비하는 보수인사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신년기자회견을 통해 다양한 국정방향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한미공조에 의한 북한비핵화 기조 유지, 해외시장 개척, 청년 일자리 문제 해소, 창업 벤처 붐 확산, 경제살리기를 위한 규제개혁 지속, 과학기술과 ICT의 미래성장동력화, 복지사각지대 해소, 저소득층 생계지원 확충 및 체불임금 해결, 국민안전 확보, AI 해결 및 보상 등이 핵심 내용이다. 국론분열을 경계하며 정당대표들과의 고위급 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메시지들은 ‘권한대행’으로 현안 관리에 머무르겠다는 것 보다는 보다 진전된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메시지로 보여진다. 앞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황교안 총리는 4.6%의 지지율을 획득했다. 보수 후보로서는 2위다. 황교안 총리는 기자들의 대선출마 관련 질문에 자신의 관심사는 국정안정 뿐이라며 “지금은 오직 그 생각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황교안 총리의 ‘지금은’이란 언급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결국 반기문 전 총장의 이후 행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정치 내에서도 반기문 전 총장이 무너진 이후의 ‘얼굴마담’을 호시탐탐 노리는 기류가 강해지고 있으며, 이런 상황 자체가 반기문 전 총장에게 그리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리라는 점은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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