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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와 극우주의"문화계 좌파 많아서 재단 필요", "대포폰은 도·감청 때문"
김민하 기자 | 승인 2017.01.20 15:49

박근혜 정권을 운영한 사람들은 근본주의자였는가? 최근 드러나는 이 정권의 국정운영 실체를 보고 나니 그런 생각뿐이다. 가장 명백한 증거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노컷뉴스는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 특검 조사 과정에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조윤선 문체부 장관은 이후 문체부 관계자를 통해 보낸 문자 메시지에서 “그렇게 진술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어쨌든 특검의 수사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와 언론 보도를 보면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실재했고 이와 관련된 지시가 청와대 수준에서 있었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굳이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든 정권의 의지는 무엇이었을까. 반복해서 확인되는 것은 보수정권이 문화계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흐름이 ‘좌파’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인식을 가졌다는 거다. 이는 ‘좌파 청소부’를 자임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던 이명박 정권에서도 거듭 확인된 사실이다.

이 정권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노후를 위해 만들었다는 의혹을 받는 미르·K스포츠 재단 역시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19일 재판에 출석한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재단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문화계에 좌파인사가 많아 정부의 의도대로 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안종범 전 수석은 이전의 재판에서 조동원 전 새누리당 홍보본부장과도 같은 내용의 문자를 주고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정권이 인식하기에 이러한 좌파의 영향력은 문화계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문화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블랙리스트에 준하는 어떤 ‘지침’이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20일 오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관리의 '설계자'로 거론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차량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하여간 ‘문화’가 1차적 타겟이 된 것은 언어가 아닌 수단을 통해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예술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예술의 장에서 ‘좌파’를 밀어내고 자신들의 ‘우파’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으로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이런 측면을 보면 코란에 나와 있는 대로의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겠다면서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는 문화재를 파괴하는 데 골몰하는 IS의 인식이 연상된다. 둘 다 현대의 근본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근본주의자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동시에 기만적이라는 거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재판에서 했다는 얘기를 보면 그렇다. 정호성 전 비서관은 1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에서 대통령이 차명으로 된 이른바 ‘대포폰’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밝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발언은 대포폰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언급됐다는 것이다.

정호성 전 비서관은 도·감청을 우려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마저도 도·감청을 걱정해야 했다는 건 이 나라의 정보기관이 대통령보다 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이거나 대통령이 정보기관에도 포착돼서는 안 될 불법적 일에 관계했다는 걸 의미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자를 먼저 판단하겠지만 정호성 전 비서관이 주장하는 건 전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거듭된 재판관들의 추궁에 정호성 전 비서관이 내놓은 답은 과거부터 해왔던 관성이 대통령이 되어서도 유지됐다는 것이다.

만일 사전적 의미 그대로 철저한 근본주의적 인식의 소유자라면 자기가 무엇을 하든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정호성 전 비서관의 증언은 ‘남이 규칙을 위반하니 나도 규칙을 위반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권력을 손에 쥔 이후에도 효력을 발휘했다는 걸 보여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포폰을 사용했다는 게 아니라, ‘이전 정권이 불법적 사찰을 했기 때문에 우리도 이에 대응해 대포폰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탄핵심판 7차 변론기일인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21세기 근본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번 사건의 곳곳에서 반복해서 발견된다. 보수 세력에 몸을 담고 있거나 담은 경력이 있는 인사들은 언론 곳곳에 등장해 블랙리스트 문제가 이 정권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취지의 주장을 내놓고 있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에서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신문과 예술인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존재했다는 거다. 과연 당시에도 그림을 통해 시국을 풍자한 화가를 찍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대응하라는 지침이 존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밑바닥에서 ‘민주정부나 보수정부나…’라는 논리로 바뀌어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종횡무진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근본주의자들의 기만적 상황인식이 정치적 냉소주의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의 근본주의와 극우정치, 정치적 냉소주의는 한 뿌리에서 다시 만난다. 이런 현상은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유럽 극우돌풍의 핵심 거점인 프랑스 국민전선의 마린 르 펜은 전통의 자유주의 정치관을 존중한다면서도 무슬림이 프랑스의 공화주의적 가치와 여성의 인권을 짓밟기 때문에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인종주의자이자 여성혐오론자이지만 힐러리 클린턴이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솔직한 사람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지시각 20일 공식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는 언론이 거짓 뉴스를 만들어 자신을 음해하기 때문에 언론에 대한 탄압이 정당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고 있다.

21세기 근본주의의 대표주자인 IS에서도 이런 식의 기만적 행태가 드러난다. IS는 코란의 이상과 유토피아적 비전을 말하지만 실제 조직원을 포섭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는 ‘돈과 여자’라는 가장 속물적인 코드다. IS의 전략에 넘어가 터키로 떠났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은 ‘김군’의 사례는 근본주의의 기만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김군의 행동은 이슬람의 이상을 추종한 결과가 아니라 이른바 ‘역차별’에 반발한 게 원인이 된 걸로 알려져 있다.

즉, 우리가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제에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박근혜 정권의 극우적 성격은 단지 그들이 권력을 수단으로 해서 자유주의적 형태의 예술을 공격하였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정권은 냉소적 현실인식에 기초한 21세기의 근본주의를 그대로 답습한 형태를 띄고 있다. ‘비선 실세’라는 최순실 씨가 했다는 거의 모든 비행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박근혜 정권의 극우성을 극복하자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만적 근본주의, 그리고 이를 이루는 정치적 냉소주의와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따라서 대안적 권력을 창출하겠다는 사람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다시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그저 반대쪽에 힘을 싣는 일을 반복하는 걸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운동장이 기울어진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운동장이 영구히 균형을 유지한 상태로 있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야권의 지도자들은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이제는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보수정치의 파탄에 기대는 통치가 아니라 대중의 힘을 등에 업고 통치를 위한 질서와 원칙을 형성해나가는 정치의 구현이 절실한 시기다.

김민하 기자  acidkis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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