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남시는 영화 <아수라>에 등장하는 가상의 세계다. 박성배(황정민 분) 시장에 의해 제2의 분당 만들기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안남시는 한눈에 봐도 슬럼화가 눈에 띄는 빈민들의 도시다. 그런데 인터넷 곳곳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낙후되고 부패한 도시, 안남시민을 자청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수리언이라고 부르며, 최근 광화문 촛불집회에 ‘안남시민연대’라는 깃발을 들고 참여해 현실의 박성배(a.k.a 박근혜, 최순실)을 규탄한 바 있다.

손익분기점(약 380만 명)을 넘지 못하고, 최종 스코어 259만 명에 그친 <아수라>는 상업적 기준에선 철저히 망한 영화다. 그리고 영화 개봉 당시 평단과 관객들의 반응도 극단적으로 나뉘었던, 요즘 한국영화에서 흔하지 않은 사례로 꼽혔다. 하지만 <아수라>는 흥행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둔 다른 한국영화보다 더 많이 인터넷상에서 회자되고 있다. 혹자는 인터넷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아수리언’ 혹은 ‘안남시민연대’를 두고 한국 영화 최초 컬트현상을 만들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영화 <아수라> 스틸 이미지

영화 속 대사, 캐릭터가 인터넷 상에서 혹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유행처럼 회자되는 현상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 <신세계>(2013)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 영화들에서 관객들이 몰입하고 흠모하는 상대는 극중 캐릭터와 몇 마디 대사였지, <아수라>처럼 감독이 구현한 영화 속 세계 자체에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스스로를 아수리언이라 부르고 ‘안남시민연대’로 활동하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다. 지난해 9월 극장 개봉 당시 <아수라>를 관람한 수많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쓸데없이 잔인하고, 배우들의 열연이 아까운 알맹이 없는 작품으로 평가됐었다. 하지만 아수리언들에게 있어서 <아수라>의 김성수 감독은 영화의 신이며, 정우성은 연기의 신이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욕하면서 봤다는 <아수라>를, 아수리언들은 왜 ‘안남시민’으로 자청하면서까지 열띤 반응을 보이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관객이 어떤 영화에 강하게 매료되었다는 것은, 그 영화가 그 사람의 취향에 맞았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아수리언들이 <아수라>에 강한 끌림을 느낀 것도, 김성수 감독이 구현한 안남시라는 가상의 세계에 묘한 흥분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지난 11월 씨네21이 스페셜로 기획한 아수리언들과의 인터뷰 및 대담에 참여한 ‘안남시 여성회관’은 철거촌, 구시가지, 주택가가 공존하는 안남시라는 세계 안에서 사람들이 싸운다는 설정에 매료되어 5번 이상 관람했다고 털어놓는다. 이들이 ‘안남시민’이 된 이유는 제각각이다. 이들은 <아수라>의 캐릭터에 이입되는 순간 온전히 영화를 즐길 수 없다면서, 캐릭터들에 대한 몰입을 철저히 배제한 채 안남시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아수라>가 구현한 안남시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공간이다. 부패한 정치인, 검사, 경찰이 전면에 등장하는 터라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풍자하는 요소가 간간히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수라>가 최근 한국영화의 트렌드처럼 번지는 사회 고발, 비판 영화와 맥락을 함께하느냐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아수라>의 관심은 악당들끼리 누가 더 나쁜 놈인지 대결하고 치고받고 싸우는 데만 있는 듯하다.

영화 <아수라> 스틸 이미지

씨네21과의 인터뷰에 참여한 ‘안남시 여성회관’의 말처럼 <아수라>에는 도무지 정이 가는 캐릭터가 한 명도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들은 죄다 평면적이고, 애초 악당이 되기 위해 태어난 몹쓸 존재들 같아 보인다. 그래도 굳이 안쓰러운 인물을 한 명 꼽자면, 아픈 부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의 소굴에 들어가 악행의 쳇바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도경(정우성 분) 정도다. 하지만 <아수라>는 한도경이 최후를 맞는 순간 비로소 만세(?)를 부르게 되는 이상한 영화다. 한도경 역시 죽어야하는 나쁜 놈이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깊은 반성이 없었으니까. 이런 인간에게 <아수라>는 헛된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아수라>는 애초 사회정의구현 판타지를 선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만약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면, <내부자들>(2015)의 안상구(이병헌 분), <더 킹>(2017)의 박태수(조인성 분)처럼 한도경의 각성이 나와야 하는데 <아수라>에는 그런 장면이 일절 없다. 물론 <내부자들>, <더 킹>도 악당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 그 반대편에 서게 된 안상구, 박태수를 두고 그들이 개과천선한 것으로 거창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궁지로 내몬 이들에 대한 복수로 한정짓는다. 요즘 의도치 않게 사회정의구현 판타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한국 영화에서 뼛속까지 정의로운 영웅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오다가 더 나쁜 놈에게 좌절당하고 복수를 꿈꾸다가 어느 순간 정의의 사도 편에 서게 된다.

영화 <아수라> 스틸 이미지

하지만 <아수라>의 한도경에게선 그런 시늉조차 보이지 않는다. 박성배와 김차인에게 이용당하고 치이는 삶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한도경은 완전히 폭발해 버리고, 결국 모두가 지옥을 맛보게 된다. 그렇다면 <신세계>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력과 복수를 정당화하는 “브라더” 같은 대사가 나와 줘야 하는데, <아수라>에는 그것조차 없다. 그나마 영화 초반 유일하다시피 인간적으로 교류하는 한도경과 문선모(주지훈 분)의 관계조차 시간이 지날수록 얄팍해진다. 이렇게 <아수라>에는 기대고 싶은 인물이 한 명도 없다. 누구 말대로 다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수라>의 매력은 도무지 설득되지도 않고, 애초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들지 않는 안남시만의 괴이한 세계관에서 나온다. 온갖 대사로 캐릭터간의 관계를 설명하며 이해시키려는 영화가 아니라, 감독에 의해 세심하게 구현된 미장센을 통해 보여주기를 자청하는 영화. 설령 그것이 감독의 자기 과시와 과잉으로 비추어지더라도, 틀에 박힌 기획영화가 난무하는 요즘의 한국 영화계에서 <아수라>만큼 감독의 개성과 색채, 뚝심이 드러난 영화가 있을까.

물론 <아수라> 외에도 2016년 우리는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라는 한국 영화에서 정말 보기 드문, 작가주의 색채가 물씬 풍기는 영화 한 편을 만났다. 하지만 <아수라>가 그랬듯이 <비밀은 없다>도 흥행에서 처참히 실패하고 만다. 이 두 영화에게 죄가 있다면 투자, 배급사 CJ 엔터테인먼트에 의해 요즘 한국 관객들이 선호하는 K-누아르, 정치, 범죄 스릴러로 멋지게 포장되었지만 그 기대를 와장창 무너트린 것밖에 없다. 애초 <아수라>와 <비밀은 없다>는 흥행과는 거리가 먼, 소수의 마니아들이 격하게 환영할 만한 컬트영화에 가깝다. 하지만 상업적 흥행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CJ 엔터테인먼트가 메인 투자, 배급사로 참여하고 티켓파워가 있는 유명 배우들이 영화에 참여하면서 주류 영화로서 기대치가 올라간 것뿐이다.

영화 <아수라> 스틸 이미지

<아수라>는 CJ 엔터테인먼트가 투자, 배급사로 참여했단 점과 정우성, 황정민, 곽도원, 주지훈 등 MBC <무한도전>에 2주 연속으로 출연할 수 있는 스타 배우 등 흥행 요소는 두루 갖추었지만, 정작 흥행에는 처참히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한국 영화사 최초로 한 편의 영화, 그것도 영화 속 가상 세계에 열광하는 팬덤을 만든 이례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다. 아수리언들에게 김성수 감독은 영화의 신이며, 안남시는 그들이 살고 싶은 동네다. 아수리언들은 지난해 11월 김성수 감독, 영화를 제작한 한재덕 프로듀서, 정우성을 불러 <아수라>를 함께 보는 단관 행사를 열었고, 그들에게는 한도경으로 불리는 정우성을 통해 영화 속 유명한 대사 “박성배 앞으로 나와”를 “박근혜 앞으로 나와”로 바꾸어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요즘 그들의 목표는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 촬영 때문에 안남시민들의 밤에 불참한 박성배(황정민) 시장을 단관 행사에 불러들이는 일이다.

<아수라>의 매력에 흠뻑 빠지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봤을 때는 <아수라>에 이토록 열광하는 이들이 놀라울 법하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한 영화를 영화계 안팎에서 끊임없이 회자시키는 안남 시민들의 행동은 계속되어야 하고 ‘아수리언’과 같은 팬덤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안남시민이 되기를 자청한 아수리언들처럼 영화 속 가상 세계에 열광하는 현상은 흔치 않고, 앞으로도 보기 힘든 기이한 현상으로 남을 듯하다. ‘아수리언’ 덕분에 한국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아수라>가 새삼 대단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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