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출범 첫 해인 2013년, 한재림 감독은 조선시대 계유정난(1453년)을 배경으로 한 <관상>을 세상에 내놓는다. 수양대군의 성공한 쿠데타를 배경으로 한 <관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 정변을 떠올리게 하면서, 유신 잔재들에게 권력을 내준 시대의 암울한 패배적 정서가 은연중에 담긴 씁쓸한 영화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한재림 감독은 <관상>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는 영화 한 편을 공개한다. 원래 <더 킹>은 2016년 말 상영할 예정이었지만, 2017년 1월 상영으로 미뤄진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영화 <더 킹>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얼룩진 오늘날 대한민국 현실을 뛰어넘지는 못하지만,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부정부패에 몸살을 앓고 있는 국민들의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는 역할은 그럭저럭 해낸다.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2010) 성공 이후 한국 상업영화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사회 비판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더 킹>의 미덕은 여기서 나온다.

영화 <더 킹> 스틸 이미지

<더 킹>은 주인공 박태수(조인성 분)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온갖 좌절과 고통을 딛고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박태수의 일대기는 영웅서사적 면모를 띠기도 한다. 하지만 박태수는 보통 시민들이 기대하는 정의로운 영웅상과 거리가 멀다. 박태수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나라까지 팔아먹을 인물에 가깝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인물인 한강식(정우성 분), 양동철(배성우 분)도 대부분 그러하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가 대한민국 역사고, 법이라고 믿는다.

오직 자신의 출세와 안위만 걱정하고 그에 따라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박태수, 한강식, 양동철은 대한민국 검사다. 물론 <더 킹>에도 정의로운 검사 몇 명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철저히 박태수의 시점으로 움직이는 이 영화에서 박태수의 성공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안희연(김소진 분) 검사는 제거하고픈 눈엣가시다. <더 킹>에서 박태수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무조건적이다. 이런 식으로 이 영화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법은 단순하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듯이 박태수가 손을 잡게 되는 동지와, 그가 제거해야 하는 적도 바뀐다. 자신이 아군이라고 믿었던 한강식과 양동철에게 배신을 당하고 일생일대 최악의 위기에 빠진 박태수가 각성을 하는 순간,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천지인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던 <더 킹>은 비로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관통한다.

영화 <더 킹> 스틸 이미지

<더 킹>의 주인공 박태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인물이다. 그가 변한 것은 무너진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배신한, 엄밀히 말하면 성공이 눈앞에 보이던 자신을 끌어내린 한강식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다. 한편에는 그동안 사회적 성공에 눈이 멀어 인생을 잘못 살았던 자신에 대한 반성도 조금이나마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박태수라는 캐릭터에게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장치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복기다. 극 중 한강식의 대사를 빌면 <더 킹>에서는 박태수의 삶 자체가 대한민국의 역사고,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1%가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거쳐 온 박태수의 지난날은 부정하고 싶지만, 되돌릴 수도 없고 외면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맥락을 함께한다.

개인을 통해 대한민국 역사를 반추한다는 시도에 있어서, 나는 <더 킹>을 <베테랑>(2015), <내부자들>(2015)과 같은 대한민국 기득권 비판 영화가 아니라 <국제시장>(2014)과 비교하고픈 충동이 들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고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를 그렇게 싫어했다던 박근혜 정부가 투자자 걱정까지 할 정도로 애틋하게 여겼던 <국제시장>과 달리, <더 킹>은 일명 ‘김기춘, 우병우 전상서’라고 불릴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부정하고 싶은 지난날에 대한 재연들이 수두룩하다.

영화 <더 킹> 스틸 이미지

아마 박근혜 정부가 서슬 퍼렇게 지속되고 있었다면, <더 킹>은 제작도 힘들었을 것이고 상영이 되었다고 해도 <더 킹>은 영문도 모른 채 블랙리스트에 올랐을지 모른다. 물론 <더 킹>과 비슷한 강도로 대한민국 기득권을 비판하고 흥행에도 성공한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과 제작사, 주연 배우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으니 그래도 박근혜 정부가 검찰을 비판한 상업영화 한 편으로 위기의식을 느끼는 후진 나라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정황들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더한 것도 상상하게 된다.

<더 킹>을 잘 만든 영화, 좋은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 킹>에 ‘목청껏 설명하며 한사코 흥분하니’라는 박평식 평론가의 평대로 이 영화는 화면보다 말이 앞선다. 물론 김우형 촬영감독과 합작한 세련된 장면 구현과 신민경 편집 감독의 손에서 나온 몽타주 배열이 인상 깊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더 킹>은 영화보다 한재림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더 눈에 들어온다. 이는 <더 킹>뿐만 아니라, 최근 사회 비판적 요소를 강하게 끌어온 한국 상업영화 대부분이 저지르는 오류다.

미장센을 통해 섬세하게 구축된 이미지 대신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이 앞서다보니 쾌감을 느끼는 속도는 빠른데, 그 잔상이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리고 <더 킹>은 한국 현대사의 악의 축에 가까운 박태수가 달라진 이후 시기를 짧게 다루다보니, 이야기가 급변하는 것 같은 아쉬움도 남는다. 아무리 극적인 재미가 최우선인 상업영화라고 해도, 어떤 시퀀스에는 한 정권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안일하게 단정 지을 수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영화 <더 킹> 스틸 이미지

하지만 < 더 킹>은 요즘 같은 시대에 필요한 영화라고 불러주고 싶다. 영화는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사회 변화에 대한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현 시국과 맥락을 함께하는 <더 킹>은 보고 나면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 한국 현대사와 흐름을 같이 하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신파적 정서에 기대지 않고, 지루할 틈 없이 흥미롭게 다룬 것은 <변호인> 이후 실로 오랜만이다.

그렇다고 <더 킹>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대한민국의 지난날을 모두 인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단순히 ‘김기춘 우병우 전상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통쾌한 반성과 일침’으로 단정 짓기에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영화 <더 킹>. 하지만 철저히 흥행을 위해서 기획, 제작된 <더 킹>에 대한 평가는 관객의 몫이다. <더 킹>은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하는 시민들의 곁에서 멍석을 깔며 바람만 넣을 뿐, 대한민국을 제대로 평가하고 바르게 세우는 것은 결국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국민의 몫이다. 현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더 킹>의 엔딩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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