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이름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화제가 되는 사건 중에는 해프닝에 가까운 것도 있고 해명이 필요해 보이는 것도 있다. 이런 문제가 반기문 전 총장의 정치적 행보에 부정적 영향을 주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적 비전이 아닌, 주변적 사건들이 화제가 되는 것은 결국 반기문 전 총장 본인의 정치노선이 분명치 않은 탓도 있다고 볼 수 있어 문제다.

가장 큰 화제가 되는 사건은 반기문 전 총장이 선친 묘소를 참배하는 과정에서 퇴주잔에 담긴 술을 물리지 않고 마셨다는 것이다. 반기문 전 총장 측은 퇴주가 아니라 음복을 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반기문 전 총장이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의 제례 문화를 망각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문제가 중대한 정치적 스캔들로 다룰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반기문 전 총장 측의 주장대로 지역과 가문에 따라 제례절차가 상이할 수 있고, 세간의 의혹대로 반기문 전 총장이 실수(?)한 것이라 하더라도 큰 죄가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기문 전 총장의 정치적 비전이 명확하기만 하다면야 이 정도 문제는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날 화제가 된 또 다른 사건은 경우가 좀 다르다. 미국 뉴욕의 독립언론사인 이너시티 프레스에 소속된 매튜 리는 17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전화연결에서 반기문 전 총장의 동생과 조카 등이 이해충돌을 일으키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사업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반기문 전 총장의 둘째 동생인 반기호 씨가 ‘미얀마 유엔대표단’이라는 직함을 달고 미얀마에서 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매튜 리는 또 최근 미국 검찰이 기소한 ‘반기상 반주현 사건’과 관련해서도 반주현 씨가 근무하던 회사가 유엔이 입주해있는 건물의 건물주이며 베트남에서 부동산 매각 관련 브로커로 나섰던 말콤 해리스 등이 유엔 난민기구와 사업을 진행한다는 등의 발언을 하고 다녔다는 의혹도 언급했다. 또 반주현 씨가 경남기업의 베트남 건물을 매각하려 했던 카타르 정부가 반기문 전 총장의 중동 방문 일정을 후원했다는 의혹도 언급됐다. 반기문 전 총장과 인척관계로 얽힌 이들이 반기문 전 총장의 지위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했고 반기문 전 총장 역시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인 셈이다.

반기문 전 총장은 이미 과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23만달러를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은 해당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를 대상으로 중재를 신청하고 귀국 직후 이 의혹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나 연이어 친인척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 사건에 대해서도 의문이 다시 제기되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명이 있지 않으면 반기문 전 총장이 ‘정치교체’를 언급하며 대중에게 어필한 ‘기성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장점이 퇴색될 확률이 크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7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을 방문, 일정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의 조건에서 이런 일련의 논란들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효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 반기문 전 총장이 애초 예상한 것만큼의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국내 언론들은 반기문 전 총장이 독자세력화나 무소속 출마가 아닌 기성 정당에 입당하는 형식의 행보를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16일 기자들과 ‘치맥’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역대 대선 후보 중에 당 없이 (출마)한 사람이 있느냐”, “종국적으로 어느 쪽이든 정당과 함께할 것”이라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반기문 전 총장은 “지금 차량 두 대에 대선 캠프 사무실 등을 운영하는데 한 달에 수천만원이 드는데 그동안 모아놓은 사비로 쓰고 있다”, “지금 금전적으로 힘들다”는 발언도 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발언이 반기문 전 총장을 기성 정치권에 대한 ‘을’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반기문 전 총장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충분히 확보되었다면 기성 정당에 입당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중심으로 기성 정당의 ‘헤쳐모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기성 정당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처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여과없이 노출된 것이다. 반기문 전 총장이 기성 정당에 입당한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정당은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인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분위기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17일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는 반기문 전 총장이 기성 정당에 입당할 가능성을 내비친 것에 대해 “그것은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다소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다. 조만간 국민의당과 세력을 합칠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의 주인공인 손학규 전 의원도 “기존 수구세력에 얹혀서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결코 수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발언하고 있다. 바른정당의 경우 반기문 전 총장이 귀국하고 중도보수층의 움직임이 관망으로 고착화되면서 내부에서 심상찮은 기류가 형성됐다는 해석이 나오는 상태다.

반기문 전 총장을 둘러싼 이러한 상황은 결국 철학의 부재라는 문제와 조우하게 된다. 만일 반기문 전 총장이 하겠다는 정치가 명확한 비전과 철학을 갖춘 것이라면 이런 저런 정치공학적 쟁점과 해프닝은 주변적인 것들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기문 전 총장이 사실상 대권행보에 시동을 건 상황에서도 어떤 청사진도 내놓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실들만 부각되고 있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반기문 전 총장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지 자체가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만일 ‘새누리당 입당’이라는 마지막 선택만 남게 되면 반기문 전 총장이 대통령직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시나리오를 현실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반기문 전 총장 본인이 최소한의 정치적 기지를 발휘하면서 자신만의 철학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귀국 이후 한 일들을 돌이켜보면 이럴 가능성이 있는지 미심쩍다는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알기 때문에 벌써부터 기성 정치권 인사들은 반기문 전 총장의 실질적 낙마 이후 상황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의 존재를 정계개편의 불쏘시개 정도로 쓰고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와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대선출마설이 나도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비대위 대표는 반기문 전 총장과의 연대설에 대해 “정치 교체’를 한다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왜 자꾸 나를 그 사람에게 결부시키느냐. 기분 나쁘게…”라고 반응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과 함께 특히 앞서 언급한 ‘퇴주잔 논란’은 설을 앞둔 상황에서 ‘밥상 민심’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자신만의 정치철학과 정책적 비전을 내놓아 판을 흔들고, 소소한 해프닝은 밥상에서 치워버리도록 하는 게 정공법이다. 남은 기간 동안 반기문 전 총장이 과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꽃동네 방문 등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정도로는 성공할 수 없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