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그 이름 석자가 서서히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앞서 그의 이름을 접했을 때 내 첫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글로벌 리더' 내지는 '세계의 대통령'이라 칭해지는 유엔 사무총장을 10년간 지내고 무슨 미련이 있어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판에 이름을 올렸나라는 놀라움이었다. 그것도 사무총장직을 그만두자마자 곧바로. 놀라움은 곧바로 의문으로 이어졌다. 겉보기엔 동네 할아버지처럼 소박하게 생겼던데 그렇게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는지 말이다.

반기문을 연상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알다시피 그는 외교부 장관이었던 반기문을 유엔의 사무총장 자리에 앉히기 위해 온 세계를 뛰어다녔다. 한나라당이 김선일 피살사건과 그 외의 여러 가지 명목으로 반기문을 낙마시키기 위해 총력공세를 퍼부을 때, 그를 육탄 방어한 것도 노 전 대통령의 몫이었다. "한국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나온다는 것은 멋진 일 아니냐. 욕은 내가 먹는다"면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6일 오전 부산 강서구 김해국제공항 출국장을 나서며 지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러나 반기문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영상이나 서면 메시지라도 보내달라는 유족들의 간곡한 요청도 거부했다. 일이 있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봉하마을에 들르지 않았다. 그의 처신이 문제가 되자 그는 2011년 말 쯤에야 묘소를 찾았다. 그것도 언론에 비공개를 조건으로. 그가 '배신의 아이콘'으로 찍힌 것은 이런 연유가 있어서다. 물론 그는 "평생 배신을 모르고 살았다"고 발끈했지만.

내 기억 속의 반기문은 이렇듯 권력욕과 배신자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 대한 판단을 서둘러 내리고 싶진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또 완전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정치인치고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게 없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을 터. 어차피 소크라테스나 예수 같은 성인들을 뽑자는 것도 아닌데 웬만한 흠은 그냥 넘겨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명박과 박근혜도 대통령 되는 세상인데, 하물며 반기문이라고.

그러나 알량한 내 생각은 그가 이 땅에 발 딛고서 처음 내지른 ‘정치교체’란 말 한 방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적 연민 또한 귀국 이후 그가 보여준 행보와 그 틈 사이로 내비친 시대착오적인 때 묻은 속살을 보고서 완전히 접었다. 어떤 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치교체’라는 말 한 마디, 때 묻은 속살에 왜 그렇게 흥분하는가라고.

간단하다. 나는 반기문의 ‘정치교체’ 주장에서 우리가 청산코자 하는 옛 시대의 향수를 읽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반기문의 "정권교체 아닌 정치교체로 국민대통합을 이루겠다"는 말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가 외쳤던 "정권교체 아닌 정치교체로 국민대통합을 이루겠다"는 주장과 글자 하나 틀림없이 완벽하게 일치한다. 새로움을 기대한 국민에게 그는 흘러간 옛 시대, 더구나 지우고 싶은 박근혜의 기억을 되새김한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반기문은 왜 박근혜의 슬로건을 따라했을까? 아니, 그 전에 박근혜는 왜 ‘정치교체’를 내세웠을까? 그 이유 또한 간명하다. 전임자 이명박을 잇는 '새누리 정권 시즌, 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여, 그 식상함을 가리기 위해 안철수가 선창한 '정치교체'를 저작권료도 없이 무단으로 따와서 제 것으로 삼았던 거다. 반기문의 ‘정치교체’ 주장을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새누리 정권 시즌, 쓰리'를 열겠다는 다짐에 불과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고로 새술은 새부대에 담으랬다. 그러나 새로움을 이야기하는 반기문과 그 주변에선 쾌쾌한 과거가 진동한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이명박 사람들이 그 안팎을 점령하고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종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친근함 대신 거부감만 던져준 '서민 행보'가 그 증거다. 나경원 의원이 반기문 캠프에 합류한 것에 대해 역사학자 전우용은 이렇게 말했다. "나경원은 이명박, 박근혜, 반기문이 ‘단일 계보’임을 입증하는 산 증인이다."

일언이폐지, 나는 대선주자의 인간적 흠에 대해선 별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새것을 촉구하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주장이나 몸짓은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정치교체’를 부르짖으며 박근혜 정부를 연장하겠다고 선언하고, 박근혜보다 더 오래된 이명박 사람들로 주변을 색칠한 반기문을 반대하는 것도 그래서다. 분명히 하자. 1000만 촛불 민심이 요구하는 것은 ‘정권교체’다. 옛것을 그대로 두고 어찌 새날을 노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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