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가 24일 열린 1심 결심공판에서 4년 구형을 받았다. 2006년 6월 20일 첫 재판 이후 1심 결심공판이 이루어지기까지 1,162일(3년 2개월)이 걸렸다. 대부분의 형사사건이 6개월을 넘기지 않는다. 지난해 총 형사사건 268,572건 가운데 1,087건(0.4%)만 2년 이상 재판이 진행됐다고 한다. 공판이 43차례나 열린 것도 황우석 사태의 스펙터클을 반영한다.

선고공판은 10월 19일 열릴 예정이나, 항소심과 상고심까지 생각하면 황우석 사태에 대한 사법적 심판은 수년이 더 걸릴 전망이다. 이를 고려하면 4년이라는 1심 구형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느낌이다. 황우석 박사가 정치구조적인 대국민사기극의 주연이었다는 사실과 황우석 사태가 국민에게 미친 영향으로 미루어본다면 시민의 법 감정에 충실한 구형으로 읽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신문은 1심 공판 기사를 2,3단 짜리 정도로 간략하게 다뤘다. 중앙이 약간의 비중을 두었고 조선이 기사와 칼럼을 싣는 정도였다. 한겨레를 제외한 조선, 중앙, 동아, 경향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법정에 들어가거나 나오는 황우석 박사의 사진을 기사와 함께 배치했다.

8월25일자 중앙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의 황우석 1심 결심공판 기사

5개 신문의 논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찰의 구형 요지, 황우석 박사의 진술, 황우석 박사 변호인의 최후변론 요지, 황우석 박사 지지자의 응원 등을 간단간단하게 서술했다. 다만 기사 서술 방식에 있어 조중동과 경향이 황우석 박사 또는 변호인의 진술을 기사의 마지막 단락에 배치한 데 비해 한겨레만이 수사 의뢰를 한 서울대 진상조사위원회의 입장을 환기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신종플루와 나로호의 이슈에 묻혀 또는 세간의 기억에 묻혀 그리 관심을 집중할 사안이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단지 1심 결심공판이 있었고 검찰이, 황우석 박사 변호인이 무슨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라는 법정 풍경을 전하는 것으로 넘어갈 문제일까. 3년 전에, 그리고 3년 동안 대한민국이, 시민사회가 황우석을 어떻게 품었고, 그로 인해 어떻게 앓았고, 이후 얼마나 엄청난 트라우마에 시달렸는지, 그 기억 속의 상처와 현실의 상처가 잘 치유되었는지 따위가 궁금하지 않는가.

재판에 임하는 황우석 박사의 늠름한 자태와 만족스런 얼굴 표정, 그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대한민국 국민을 들었다 놨던 ‘황우석 사태’를 기억하는 언론과 저널리스트라면 누군가 ‘3년 걸린 1심 구형 4년’의 의미를 따져봤어야 하지 않을까. 황우석 사태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이라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말이다.

황우석 사태가 국민적 이슈로 폭발한 것은 얼추 2005년 11월 24일 쯤으로 잡을 수 있겠다. 그날 황우석 박사는 여성연구원의 난자 제공 사실을 시인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황우석 박사는 그동안 연구원의 난자 기증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22일 ‘PD수첩’에서 “연구원이 자신의 난자부터 사용해야 실험자의 자세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냐"며 "상의했던 것이 사실이나 그 뒤의 상황에 대해서는 확인한 적 없다”고 말해 문제로 불거졌다. 헬싱키선언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일자 황우석 박사는 헬싱키선언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PD수첩’은 황우석 박사 연구팀과 내부자의 난자제공, 즉 윤리문제를 다루었다. 동일한 연구조직 안에서 자의든 타의든 연구원이 연구목적을 위해 신체 일부를 제공하는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PD수첩’은 국제관례와 도덕률에 따라 볼 때 부당하다는 논지를 폈다. 황우석 박사는 그것을 시인했고 사태는 거기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12월2일 ‘PD수첩’ 제작팀은 기자회견을 자청, 그간 취재과정을 설명하고 2차 방송 의지를 천명했다. ‘PD수첩’ 팀이 윤리문제 이상의 문제를 포착했던 것이다. 이 즈음 안규리 교수 일행이 김선종, 박종혁 연구원 인터뷰를 입수했다. 황우석 연구팀과 YTN이 합작한 이 인터뷰는 ‘PD수첩’을 한방에 기절시켰다. YTN은 이 인터뷰를 특종 삼아 시간 단위로 방송에 내보냈다. YTN의 황우석 사태 보도는 황색저널리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케 했다. 그렇게 황우석 사태를 보도했던 YTN은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오보 정정, 사생활 보호 등의 사과 방송을 하긴했으나 보도전문채널로서의 진정성 담긴 저널리즘적 반성은 하지 않았다.

12월8일 한학수 PD는 MBC 임직원에게 취재윤리와 관련한 사과 메일을 돌렸다. 한학수 PD는 이 글에서 “현재까지 취재한 바로는 환자의 줄기세포가 1개라도 만들어졌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확인된 사실만 보도한다”는 점을 강조한 한학수 PD는 11월24일 황우석 교수의 해명 기자회견이 “중대한 거짓을 포함하고 있다는 증거와 증언을 확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중대한 거짓’은 일파만파, 황우석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황우석 열풍의 사이를 비집고 ‘PD수첩’ 제작진의 용기와 ‘BRIC’의 전문성과 ‘DC과갤’의 상식의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12월15일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이 MBC 뉴스데스크 인터뷰에서 “황우석 교수의 요청에 따라 병문안을 갔다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으며, 믿고 있었던 줄기세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사태는 다시 반전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진실’을 갈구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힘을 받았다. 황우석 박사를 향한 비판은 ‘줄기세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짓에 제한되지 않았다. 생명윤리의 문제, 여성의 몸과 인권의 문제, 기초과학 지원에 있어 형평성 문제, 연구 성과의 사회적 환원의 문제, 언론에 있어 진실 보도의 문제, 애국 열기와 비이성의 문제, 영웅주의와 국익의 문제로 비화됐다.

2006년 1월10일, 서울대 조사위는 지난 12월15일부터 2006년 1월9일까지 진행한 조사결과를 최종 발표했다. 서울대 조사위는 2005년 논문은 물론이며 2004년 논문도 조작되었음을 확인했다. 서울대 조사위는 2004년 논문에서 사용된 줄기세포는 ‘처녀생식’에 의한 돌연변이라는 등의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일단락 되었다.

황우석 박사를 찬양했던 정치인들은 그제서야 발을 빼거나 함구하기 시작했다.

“황 교수는 앞서가는 사람이자 우리의 희망이므로 보호하고 지킬 필요가 있다”(정동영)
“우리 나라의 보배 중 보배인데 편찮으면 안 된다”(박근혜)
“숱한 시련을 안겨주고, 신화를 전복시키려는 보이지 않는 악인들에게 강하게 말하고 싶다”(손학규)
“연구단계에 있는 과학적 결과물을 과도하게 취재하고 파헤치려 함으로써 우리 학계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과학자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 사태”(이해찬)
“나도 MBC ‘PD수첩’의 이 보도가 짜증스럽다”(노무현)
“부당한 방법으로 과학자를 못 살게 구니까 방송국이 흔들흔들하고 광고 끊어지고 난리 아닙니까”(유시민)
그리고 당시 ‘황우석 교수와 함께하는 의원모임’ 소속 43명의 의원들.

황우석 사태는 그렇게 2005년 대한민국의 가을과 겨울을 달구었다. 2004년 여름부터 BT산업을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적극 육성하겠다며 박기영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 김병준 정책실장, 오명 과학기술부총리 등이 황우석 박사 연구지원에 나섰고, ‘황금박쥐’의 활약에 힘입어 수백억 원의 연구지원비가 황우석 박사 연구팀의 손으로 넘겨졌다. 노무현 정부가 야심차게 내걸었던 의료산업선진화에 대한 기대는 불과 2년도 안 돼 황우석 사기극과 함께 막을 내렸다.

다시 3년이 지났다. 황우석 박사는 웃는 표정으로 1심 결심공판에 임했고, 검찰은 4년을 구형했다. 오늘 신문은 아무도 그 과거를 들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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