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적폐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쌓여온 폐단이라는 의미다. 직접적으로는 유신독재로부터 이어온 질곡이겠고, 더 파고들면 제1공화국 아니 왕권을 흔든 조선의 당파 노론으로부터 이어진 적폐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시국에 이 적폐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단순히 드러난 상처를 봉합하는 정도로는 깊이 병든 대한민국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14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김기춘 편은 꼭 필요한 보도였다. <그알>이 정리한 김기춘 일대기는 독재와 부정한 권력의 연장, 유지 수단의 기록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여론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의 위기 때마다 간첩사건을 조작해 여론을 움츠리게 한 것이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 - 조작과 진실’ 편

조작으로 밝혀진 과거의 간첩사건들만 들여다봐도 그 실체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1958년 진보당 사건(2011년 무죄)으로 시작된 간첩조작사건은 최근 2014년 홍강철 보위부 직파 간첩 조작사건(2016년 무죄)까지 이어졌다. 아주 많은 간첩사건들이 세월이 흘러 조작으로 밝혀졌다. 그 와중에 사형이 집행된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긴 옥살이와 억울한 누명의 세월을 견딘 사람들은 버티고 버텨서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의 진실 규명은 조작사건의 피해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넓게 본다면 최소한이며, 소극적인 정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가 아닌 건강한 미래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반드시 적폐를 청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적청산은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정권이 권력유지를 위해 휘둘러온 각종 부정한 방법들을 알고 대응하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그알> 김기춘 편의 진정한 의미가 거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지난 정권들이 통치를 위해 반복적으로 사용해온 장치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북풍조성이다. 그래서 그토록 간첩조작사건이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6.25의 상처와 공포가 가시지 않은 시대에 북풍은 너무도 강력하고도, 너무도 손쉬운 여론조작의 방법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언론의 적극적인 협력과 부역이 필수적이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 - 조작과 진실’ 편

<그알>이 방영된 14일은 30년 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유명했던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수사기관의 어처구니없는 발표가 가능했던 것도 그만큼 언론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과거에는 특히 미디어의 역할이 신문과 방송에 제한되어 있었기에 아무리 반복적으로 활용을 해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21세기 들어 보급된 인터넷과 SNS는 기존 제도언론이 누렸던 정보독점을 허물었고, 그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앞서 거론된 간첩조작사건에는 널리 알려진 2013년 유우성 씨 사건도 있다. 2013년에도, 2014년에도 거듭 부당한 권력은 과거의 수법을 동원한 것이다. 이런 간첩조작사건은 권력의 생리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전혀 발전하지 못했다는 양면을 드러낸다.

간첩조작사건과는 조금 다른 여론조작의 방법은 프레임 전환이다. 이 역시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잘 활용되던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1992년의 초원복집 사건. 이 사건의 본질은 정부 및 기관의 선거개입이었다. 김기춘과 당시 민자당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으나 돌연 도청이라는 프레임으로 뒤바뀌고 만 것이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 - 조작과 진실’ 편

몇 해 전 벌어졌던 정윤회 문건사건과 너무도 판박이로 닮아있다. 본질은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었으나 순식간에 청와대 문건을 유출한 국기문란으로 사건의 성격이 바뀌었다. 그 바람에 비선실세의 폐해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어쨌든 간첩조작사건도 그렇지만 이런 프레임 전환은 언론과의 콜라보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매번 언론은 권력에 순순히 백기를 들었거나 꼬리를 흔들었다.

물론 그 부분까지는 <그알>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알>의 보도 행간에는 그런 의미가 충분히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시국에 대한 언급을 하면 도돌이표처럼 결론은 언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권력과 언론의 불륜관계는 결국 적폐를 확대재생산하게 되었음을 이번 최순실 게이트로 명명백백히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밝혀진 것도 빙산의 일각이라는 의혹도 강하다.

현재도 이 프레임 전환은 집요하고 시도되고 있다. 다만 아직은 촛불의 힘을 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권력과 언론에 대해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박수를 보낸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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