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한 번 돼 보겠다며 귀국하자마자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니고 있는 반기문 씨가 요즘 한참 힘을 주고 있는 작업이 있습니다. '서민 코스프레'입니다. UN사무총장이라는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낮은 곳에서 서민의 체취를 잠시 맡아 보겠노라는 숭고한 희생극 말입니다. 귀국 직후 지하철 타는 흉내를 낸 것도 다 이처럼 계산된 서민 행보의 일환이었는데 아뿔싸, 그 바람에 노숙자들이 이 추운 날씨에 죄다 바깥으로 쫓겨나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말았으니, 이렇게 아이러니 할 데가~!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반 씨의 하루 풍경을 담은 아래 그림들을 보시죠. 자판기에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겹쳐서 우겨 넣질 않나, 방명록에 글을 쓰면서 커닝 ·페이퍼를 슬쩍 하질 않나, 편의점에서는 외제 생수를 집었다가 보좌진의 만류(?)로 국산 생수로 바꾸질 않나, 이거 정말 너무나 황당해서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차라리 이게 반기문표 슬랩스틱 코미디라면 배꼽 쥐고 실컷 웃어나 보겠는데, 근엄한 표정으로 저런 걸 하고 있으니, 이거 참.

알다시피 반 씨가 귀국연설에서 가장 많이 강조한 단어가 '진정성'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서도 "이 어려운 시기에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저의 진정성을 짓밟는 이런 행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을 정도지요. 그런데 이렇듯 진정성을 강조하시는 분께서 왜 이렇듯 진정성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억지쇼를 남발하고 다니는지 당최 도무지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간략하게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할까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 서울역까지 공항철도로 이동하기 위해 표를 사고 있다. Ⓒ연합뉴스

첫째, 자판기에 만 원짜리 두 장 우겨넣기 = 자판기를 잘 사용해 보지 않은 사람은 처음 접하는 기계에 당황할 수 있습니다. 사용법을 몰라서 헤맬 수도 있고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거기서 종이돈 2장을 겹쳐서 넣을 생각을 다 했을까요? 차라리 솔직하게 옆에 있는 보좌관들에게 사용법을 물어서 그대로 따라 했으면 그게 더 자연스럽고 보기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UN에 있을 때, 반기문 약점 중의 하나로 임기응변이 부족하다는 점이 꼽혔었는데 감출 새도 없이 금세 들통 나고 마는군요.

둘째, 방명록 글 쓰면서 커닝 페이퍼 참고 = 이것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잖아도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 시 영어가 짧아서 수첩 없이는 UN직원들과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외국 언론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을 쓸 때조차 메모를 지참해야만 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그 정도로 순발력이 부족하고 어휘력이 딸려서야 어디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해 낼 수나 있겠어요? 수첩공주 때문에 온 국민이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젠 수첩장어라니!

KBS 뉴스 갈무리

셋째, 편의점에서 외제와 국산 생수 놓고 갈팡질팡 = 서민처럼 행세해 보겠노라고 편의점을 들렀다가 거기서 본 여러 생수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비싼 외제 생수 쪽으로 손이 갔던 모양입니다. 그걸 보좌진이 얼른 막아서 국산을 고르도록 유도한 모양인데, 이것도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네요. 아니, 외제 생수 집으면 안 됩니까? 정치인은 꼭 국산 생수만 마셔야 합니까? 설마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설정샷? 정말이지 억지가 너무 지나쳐서 온 몸에 두드러기가 다 나려고 합니다.

정치인이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얼마든지 서민코스프레 할 수 있습니다. 이회창 옹도 흙오이를 씹어 먹고, 이명박은 허름한 할매식당에서 국밥을 깨끗하게 비우는 먹방쇼를 펼쳤는데, 반 씨라고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기왕에 코스프레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연습해서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건 뭐 진정성이 느껴지기는커녕 어설픈 억지연기로 호감 대신 반감만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이래서야 어디 본선에 진출할 수나 있겠습니까?

물론 반기문의 코스프레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 같진 않겠지요. 혹은 썩소를 짓기도 하고, 혹은 그래도 봐줄 만하다며 박수를 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상술한 세 가지 풍경이 하루에 연속으로 펼쳐진 것도 그렇고, 자판기와 방명록에서 보여줬던 엉성한 대응과 메모 훔쳐보기 등이 혹시나 70을 넘긴 반 씨의 노화와 연관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과 우려를 떨치기가 쉽지 않아서 말입니다. 차라리 순발력과 암기력 부족이라면 더 낫겠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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