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내한한 길에 나를 초청하여 만찬을 같이 했다. 언제나 다정한 친구다. 대북정책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 나의 메모를 주었다. 힐러리 국무장관에 보낼 문서도 포함했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고 유쾌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18일에 쓴 일기 내용이다. 이 날로부터만 따지면 불과 석 달 만이다. 냉기로 가득한 남북관계에 다시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미국이 움직였고, 클린턴 전 대통령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북을 다녀왔다. 현정은 회장은 막혀있던 남북경협과 현안에 숨통을 터놓았다. 북은 지난 13일 유씨 석방에 이어 20일에는 육로통행 제한 등을 담은 ‘12.1조치’의 전면 철회를 발표했다. 1년 반 동안 굳어져온 통미봉남 대 ‘종미반북’(從美反北) 구도도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차려준 밥상이다. 김기남 노동당 중앙위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6명이 서울에 왔다. 귀한 손님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가만 앉아서 받아먹기만 해도 되는 밥상이다. 그런데 걱정된다. 조선일보 사설 ‘북 조문단의 서울 일정을 주목한다’ 처럼 할 것 같아서이다.

조선일보 8월21일자 사설

조선일보는 북이 남측 당국과 접촉을 외면하지 않아야 하며, 접촉이 이뤄지더라도 정부는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하지 말아야 하고, 북 핵과 미사일 문제가 해결돼야 근본적인 남북관계 개선이 가능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뒤부터 읽으면 정부는 북 핵 문제 선 해결 후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하지 말아야 하며, 북은 남과의 접촉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참으로 답답해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 발전이라는 역사의 시계를 2000년 6.15선언 이전으로 돌려놨다. 후보 당시 내놓은 ‘비핵개방3000’ 때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요체가 선 북핵 해결이다. 이명박 정부가 이 입장을 고집하는 한 남북관계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입장은 남북관계를 해결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신념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북핵 해결 해법의 대강은 지난 2007년 2월 13일에 성사된 베이징합의에서 이미 마련됐다. 6자회담 참여국이 모든 핵프로그램의 목록을 협의하고, 북미양국은 국교정상화를 위한 양자대화를 개시하며,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과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등의 수순을 밟는다는 등의 요지였다. ‘행동 대 행동’의 실천 프로그램까지 확보했다. 북핵 해결이 한반도 핵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북미간 국교정상화 과정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같은 지난 역사적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북핵 선 포기를 원칙이라고 강조하며 북의 변화만을 기대하는 한 이명박 정부는 북과 조금도 친해질 수 없다.

설마 모르지 않을 지다. 그래서 조선일보의 시름은 20일자 사설 ‘한.미, 대북정책에 대해 더 깊은 대화 나눠야’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일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현정은 회장의 5개항 합의, 북의 조문단 파견 방침 등으로 “대북 제재가 과연 실효성 있게 계속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북한이 최근 잇단 유화 제스처를 보이는 데는 한미 대북 공도를 흔들어 보려는 의도도 담겨 있을 것”이고 따라서 “한.미는 대북 제재와 재화에 대해 다른 어느 때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대화를 진행해 혼선과 갈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이명박 정부가 북이 내미는 손을 잡는 대신 한미간 결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길 기대한다. 이건 평화와 화해의 길이 아니다.

북이 남북경협의 재가동을 약속하고, 이어 ‘1.21조치’의 전면 철회를 발표한만큼, 이명박 대통령도 그에 준한 ‘행동 대 행동’의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 조선일보의 지적처럼 “북한-현대 간 합의사항 이행을 비롯해 남북 당국이 만나서 풀어야 할 현안이 쌓여 있는 마당에 북한 정권에서 대남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인사들이 오는 것”이다. 일부러 만나려 해도 만나기 어려운 북의 책임자들이 남으로, 그것도 1박2일의 일정으로 내려온다. 설령 총부리를 겨누는 적이라 하더라도 국가적 수준에서 귀한 사람은 귀한 사람이고 응당 그만한 대접을 해야 한다. “북한 고위 당국자들이 서울에 와서도 굳이 남측 당국과의 접촉을 외면한다면” 식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은 하는 게 아니다.

모든 현안 논의는 뒤로 물리치더라도, 부디 극진한 대접으로 손을 치렀으면 한다. 부디 이명박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차려준 마지막 밥상마저 외면하는 일을 연출하지 않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