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는 거목, 별로는 큰별, 원로로는 큰어른, 정치인으로는 큰지도자… 민주주의의 선구자, 한 시대의 마감, 평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 인권과 남북화해의 상징…

눈을 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리는 말들이다. ‘도착적 분단병’에 감염된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 땅의 누구인들 공감하지 않는 말들이겠는가.

촌부의 삶과는 다른, 걸음과 족적의 하나하나가 역사로 기록된 한 인물이 일대기를 마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도 결이 다른 무게감, 추모의 공기도 사뭇 다르다. 문득 궁금해진다. 대한민국의 한 역사, 한 시대가 마감된다고 하는데, 이 시점에 대한민국의 ‘비판적 지성’은 어떤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을까, 어떤 메시지를 던져놓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질시와 혐오, 질투와 증오의 관계를 정체성 삼던 전직 대통령과 정치인들. 그들이 일순간 과거에 맺은 인연을 소개삼아 거목, 큰별, 큰어른, 큰지도자 라며 숙연해하는 모습에서 지성을 기대한다는 건 무망한 일이다. 대립과 대결, 투쟁으로 점철된 지난 과거에 대한 냉정한 평가 한마디 없이 화해와 통합의 바램을 쏟아놓는 주류언론의 사설에서 합리성을 기대하는 것도 난망한 일이다.

가령 황석영은 오늘 중앙일보에 ‘선생님은 행복한 지도자셨습니다’는 제목의 추모글을 올렸다. 예의 7-8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맺었던 인연과 일화를 소개하고, 통일관과 지역차별에 맞선 모습을 떠올렸다. 후보단일화 실패 때의 아픔도 회술했다.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의 업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황석영은 추모의 마지막을 “선생님의 뜻을 이어 우리는 기필코 선진적 민주주의의 완성과 민족의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어낼 것입니다”라고 매듭했다.

중앙일보 8월19일 자, 황석영 소설가의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추모글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눈을 감은지 만 하루가 된 지금까지 온오프 언론을 통해 소개된 추모글은 대체로 이 수준을 넘지 않는다. 황석영을 비판적 지성의 반열에 올려놓고 대접할 수 있을지는 몹시 의문이지만, 누군가 황석영이 쓴 추모글의 형식과 내용을 넘지 않는다면, 오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대한민국의 비판적 지성은 그저 이 정도 수준에 머물게 된다. 저 밑도 끝도 없는 ‘선진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도대체 뭘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형식적이고 외교적인 추모글이 아니라 계승의 의미를 담는 추모글이라면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는 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하나는 고인의 죽음의 의미를 정확히 짚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공과에 대해 선명하고 분명하게 짚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한국사회에서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금기시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두 개의 추모글을 소개하고 싶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2003년 가을에 고공 크레인 위에서 비명을 달리한 고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동자에 대한 김진숙 부산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추모글이고, 후자와 관련해서는 고 정운영 교수에 대한 김수행 교수의 추모글이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1년차에 일어난 일, 김진숙 지도위원은 고 김주익 노동자가 목을 맸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모인 노동자들 앞에 나섰다. 그리고 준비해온 추모글을 읽어내려갔다. 노동자의 언어로, 노동자의 정서로, 노동자의 가슴으로 쓴 추모글이었다. 단어 하나 구절 하나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추모글을 읽어 내려간 김진숙 지도위원과 추모글을 전해듣는 사람들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고 김주익 노동자의 죽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었다. 진정으로 망자를 추모한 것이다.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그 살아있는 비판적 지성의 섬뜩한 혜안을 잊을 수 없다.

2005년 9월 어느날 고 정운영 교수가 눈을 감았다. 김수행 교수가 추모글을 썼다. 여느 추모글과 다르지 않게 과거에 맺은 인연을 소개하는 등 형식적 격을 갖추었다. 놀라운 것은 고 정운영 교수가 중앙일보에서 활동한 이력을 가차없이 비판한 대목이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김수행 교수의 추모글 중에 “당신은 중앙일보로 간 뒤부터 점점 한국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오. 나는 당신이 중앙일보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멀어졌으며 나도 놀랐지만 금년도 나의 연락망에 당신의 전화번호는 사라져 버린 것이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중국을 다니고 세계를 누비더라도 우리의 민중을 잊어버리면 마르크스주의자로서는 자격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요. 당신은 이런 것을 개의하지 않고 ‘나는 옳다’고 외치지만 민중은 당신이 삼성재벌에 포섭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고인을 추모하는 글에서 이처럼 냉정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대목이 있어 김수행 교수의 추모글은 망자와 살아있는 자 모두로 하여금 진정어린 추모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였다.

국민 모두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국화 한 송이 올려놓는 추모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지 않고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더욱이 비판적 지성을 자임하는 분이라면 고려해 주십사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의 의미를 정확히 짚던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과를 선명하고 뚜렷하게 짚어주시던가.

거목, 큰별, 큰어른, 큰지도자, 민주주의의 선구자, 한 시대의 마감, 평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 인권과 남북화해의 상징 따위의, 고인이 들어도 눈꼽만큼도 감동없어 할 하나마나한 말들 늘어놓지 마시고.

고 김주익 열사 추모사
2003년 11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

작년 한진중에서 밀려난 아저씨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30년 일해 온 일터에서 명퇴란 이름으로 강제로 밀려난 아저씨는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박창수 위원장 이야기를 하며,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는 아저씨가 자꾸 미안하다며 울었습니다.

50이 넘은 사내가 10년도 더 지난 일로 술잔에 눈물 콧물을 빠뜨리는 걸 보면서 우리 모두에게 박창수란 이름은 세월의 무게로도 덮을 수 없는 아픔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박창수 하나만으로도 우린 아프고 무겁습니다.

두번쨉니다. 대한조선공사를 한진중공업이 인수한 이후 여섯 명의 위원장 중 두 명은 구속 이후 해고되고, 한 명은 고성으로, 율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쫓겨나고, 두 명은 죽었습니다.

지난 번 위원장 선거가 끝나고 어떤 아저씨가 그러셨습니다.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 위원장 뽑아놓으면 다 짤리고 감방가고 죽어삐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김주익이를 우째 또 사지로 몰아넣겠노?"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뭘 그렇게 죽을죄를 저질렀습니까? 조양호 회장님, 조남호 부회장님, 얼마나 더 하실 겁니까? 이 소름끼치는 살인게임이 몇 판이 더 남았습니까?

노동자의 목에 빨대를 꽂고 더운 피를 마시는 이 흡혈게임이 얼마나 더 남았습니까?

LNG선상 파업으로 김주익 지회장이 구속됐을 때 인권변호사의 이름을 팔아 그를 변호했던 노무현 대통령 각하! 노동자의 가련한 처지를 팔아 따낸 권력의 맛이 꿀맛입디까? 조중동 그 찌라시들의 꼬봉노릇이 그렇게 안락하더이까?

대기업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했습니까? 21년차 노동자 기본급 105만원, 손에 쥐는 건 80만원, 그마저도 가압류로 12만원, 129일을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를 해도 청와대, 노동부, 국회의원 누구하나 코빼기도 내미는 놈이 없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걸 그랬습니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 그냥 물 말아 먹고, 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 테이프 덕지덕지 넝마처럼 기워입고, 한 겨울에도 찬물로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그냥 쥐새끼들처럼 뒹굴며 살걸 그랬습니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 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인명은 재천이라던데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걸 그랬습니다.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새끼들에 대한 미래 따위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며, 조선소 짬밥 20년에 100만원을 받아도, '회장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감지덕지 살걸 그랬습니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 박창수 동지가, 김주익 동지가, 그 천금같은, 그 억만금 같은 사람들이 되돌아 올 수 있다면, 그 억센 어깨를, 그 순박하던 웃음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볼 수만 있다면, OO이 OO이에게, OO이, OO이, OO에게 아빠를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습니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애비 잘 만난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책봉 받는 나라.

이병철 회장님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님으로 부자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님이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님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님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님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골프나 치고 해외로 수백억씩 빼돌리고, 사교육비로 한 달 수천만원을 써도 재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그들이 보기에는 한 달 100만원을 벌겠다고 숨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순이익 수백억이 나고 주식만 가지고 있으면 수십억이 배당금으로 저절로 굴러들어오는데, 2년치 임금 7만5,000원 올리겠다고 크레인까지 기어 올라간 사내가 얼마나 불가사의했겠습니까?

비자금으로 탈세로 감방을 살고도, 징계는커녕 여전히 회장님인 그들이 보기에 동료들 정리해고 막겠다고 직장에게 맞서다 해고된 노동자가 징계철회를 주장하는 게 얼마나 가소로웠겠습니까? 100만원 주던 노동자 짤라내면 70만원만 줘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의 노동자를 외치며 수 백명이 달라들어도 고작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게 또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는 나라. 물류강국을 위해 또 수십명의 화물 노동자가 길바닥에 사자밥을 깔아야 하는 나라.

섬유도시 대구, 전자도시 구미, 자동차 도시 울산, 화학의 도시 여수 온산. 그 허황한 이름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들이 바쳐지고 그들의 뼈가 쌓여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라.

50이 넘은 농민은 남의 나라에 가서 제 심장에 칼을 꽂고 마지막 유언마저 영어로 남겨야 하는 세계화된 나라. 전 자본주의가 정말 싫습니다. 이제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이주노동자를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맨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린 OO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 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OO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운영 선생 추도사 - 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어!"
2005년 9월
김수행 전 서울대 교수

당신은 너무나 깨끗하고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병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서 대강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살아 보지 왜 그렇게 칼날을 세웠습니까. 당신은 위암에도 걸렸는데 언제 또 신장병을 ‘지병’으로 가졌습니까.

내가 1977년 가족을 모두 데리고 루벵의 당신 집을 방문했지요. 나도 당신도 모두 박사논문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당신 집의 책꽂이를 보고는 놀랐소이다. 나는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에 관해 논문을 쓰고 있었고 당신은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 최근 100년의 미국 역사에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실증분석하고 있었소.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의 핵심이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기 때문에 당신과 나는 사실상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요. 그날 나는 당신이 모아놓은 책이며 논문들을 보면서 정말 탄복했소. 당신은 지나치게 완벽하려고 노력했고 그렇기 때문에 남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남들로부터 욕도 먹은 것이요.

우리가 박영호 박사와 함께 유럽에서도 만나고 한신대학에 와서 한신경제과학연구소를 만들어 마르크스경제학을 보급하는 데 얼마나 노력하였소. 당신이 소장이 되어 한 달에 한번씩 우리가 마르크스경제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각 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우리 세미나에 많이 참석하고 한국경제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지 않았소.

이것이 해방 이후 마르크스경제학의 부활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소. 그러나 그 바람에 당신과 나는 한신대학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그리고 쫓겨난 덕택에 당신과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오.

당신은 경제학자보다는 신문기자에 더욱 적성과 소질이 맞다는 생각을 나는 계속하고 있었소. 실제로 당신은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기자 생활을 한 뒤에 박사학위를 받았던 것이오. 당신은 문학청년의 소질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어 쓰는 글마다 독자들을 감동시켰소.

감성이 풍부해 소련혁명사를 인간의 해방이란 관점에서 줄줄 외우고 있었죠. 그렇기에 스탈린을 그렇게 싫어했고 고르바초프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당신이 한겨레신문이나 중앙일보에 쓰는 글마다 대학생들이 얼마나 즐겨했던가를 기억해 보세요. 모두가 당신의 문학적 상상력 덕택이었습니다.

당신은 중앙일보로 간 뒤부터 점점 한국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오. 나는 당신이 중앙일보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멀어졌으며 나도 놀랐지만 금년도 나의 연락망에 당신의 전화번호는 사라져 버린 것이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중국을 다니고 세계를 누비더라도 우리의 민중을 잊어버리면 마르크스주의자로서는 자격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요. 당신은 이런 것을 개의하지 않고 “나는 옳다”고 외치지만 민중은 당신이 삼성재벌에 포섭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키만큼이나 높은 인격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꼼꼼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정성을 높이 삽니다. 당신은 한국 마르크스경제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좀 더 살았더라면 당신의 현실적 경험을 중심으로 큰 토론을 벌릴 수 있었을 것인데, 이렇게 일찍 가버리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분명히 당신은 하늘에 있으면서도 우리를 향해 소리칠 것입니다. “바보들! 그것도 제대로 못해.” 죄송합니다. 우리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이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던 ‘새로운 세상’ ‘참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당신에게 외치네. 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고 야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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