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강공’으로 한국 외교는 상당히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일본 정부가 이를 경제 문제에까지 연결시켜 압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중국을 둘러싼 외교 환경의 변화 등을 거론하며 국내 언론은 여야의 외교안보문제에 대한 초당적 대처를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결국 박근혜 정권의 외교안보정책 실패로부터 비롯됐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초당적 대처와 대안의 마련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일본 정부는 지난 6일 주한대사와 부산총영사의 일시 귀국 조치에 이어 한일통화스와프 협상 중단과 고위급 경제 협의 연기를 언급했다.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소녀상이 설치됐다는 이유다. 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NHK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은 10억엔을 출연했으니 다음은 한국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면서 “정권이 바뀌어도 (위안부 합의는) 실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녀상 문제와 2015년 말 한일 위안부 합의가 연동돼있다는 점을 재차 시사한 것이다.

8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에 시민이 놓고 간 선물이 수북하게 쌓였다. (연합뉴스)

언론이 외교적 위기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간 보수언론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중국을 방문해 고위급 인사들과 접촉한 것을 두고 비판적 논조를 보여 왔다.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 등이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을 앞에 놓고 한반도 사드 배치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는 점 “중국에 이용당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 문제를 ‘군사 주권에 대한 내정간섭’ 정도의 관점으로 볼 것인지는 의문이다. 근본적 차원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압박 정도가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9일 중국 관영매체인 환구시보는 “트럼프가 취임 후 하나의 중국 원칙을 파기할 경우 중국은 필요하면 미국과 단교할 수도 있다”면서 “중국은 트럼프가 차이잉원을 만나지 않는 것을 감사할 필요가 없으며 하나의 중국 원칙은 미·중 관계의 근간이다”라고 주장했다.

환구시보의 이러한 반응은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7일부터 8박9일 일정의 중남미 순방에 나선 것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측이 차이잉원 총통과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낸 데에 대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달 2일 차이잉원 총통과 전화 통화를 해 중국을 자극한 바 있고 남중국해 문제나 중국 정부의 환시개입 등에 대해서도 적대적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차이잉원 총통의 이번 순방에 대해 굳이 “만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낸 것 역시 그간의 행보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어쨌든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격화되면 동아시아 정세를 관리한다는 측면에 있어서 미국에 대한 일본의 의존도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소녀상 문제를 둘러싼 잡음에도 이런 측면이 일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일본 정부가 소녀상 문제를 두고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 전에 미국에 양해를 구했다는 부분이 그것이다. 지난 6일 아베 신조 총리는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과 오전 9시 40분부터 28분간 통화했다. 바이든 부통령은 이 통화에서 “한국의 움직임이 우려된다”고 발언한 걸로 알려졌다. 이 발언이 일본 정부가 ‘강공’에 나설 수 있는 외교적 근거가 됐다는 게 한국과 일본 언론의 분석이다.

위안부 관련 문제 협의에 소녀상 이전 문제가 포함됐는지 여부는 한국과 일본 정부의 설명이 다르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해석을 사실상 부정하면서 별도의 언급을 꺼려왔지만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소녀상 이전에 한국 정부가 협력하겠다는 점이 위안부 합의에 포함돼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소녀상 이전 문제가 합의에 포함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 같다.

박근혜 정부가 2015년 말 위안부 문제 합의를 진행하면서 소녀상 이전 협력을 굳이 일본 정부에 약속했다면, 이 합의를 도출하는 것 자체에 목을 맸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의 또 다른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외교안보적 판단에 의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현재 확인할 수 없는 전자의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후자에 대해 판단해보자면, 결국 2016년부터는 한미일 동맹 구도의 강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기정사실화한 걸로 볼 수 있다.

2016년부터 한미일 동맹 구도 강화의 불가피성을 판단했다는 것은, 2015년까지 일각에서 ‘친중외교’라 불리는 일련의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이례적으로 중국의 전승절 기념 군사 퍼레이드 대통령 참석까지 이끌어 낸 ‘친중외교’ 역시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문제이거나 북한붕괴론에 대한 과도한 의존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준비위 등에서의 발언이나 남재준 전 국정원장 등을 둘러싼 일화를 보면 이들은 2015년에 북한 김정은 정권이 붕괴할 것으로 예상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의 중국 활용론은 바로 이 시나리오를 전제로 할 때에야 가능하다. 북한 정권의 붕괴를 둘러싼 상황을 ‘관리’하는 데에는 중국의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남재준 전 국정원장조차 최순실 일파들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하여간 최순실 일파가 무슨 생각을 했든 박근혜 정권의 외교안보정책을 지탱하는 한 축이 여기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4일 베이징 외교부 감람청에서 송영길 의원(왼쪽) 등 민주당 의원 7명을 만나 사드 문제 등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수언론이 문제시 하는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행보도 결과적으로는 이 맥락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한미일 동맹구도가 급속도로 강화되기 직전까지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입장은 ‘3NO(요청한 바 없고, 논의한 바 없고, 결정한 바 없다)’로 표현됐다. 이러한 입장이 전환되는 시점은 위안부 합의를 통해 한일 간의 외교적 장애물이 해소된 직후이다. 즉, 최근의 소녀상 설치를 둘러싼 갈등과 야당 의원들의 방중은 박근혜 정권이 친중행보의 반작용으로 한미일 동맹 구도 강화를 추진하면서 둔 무리수들에 의한 것인 셈이다.

이 점을 명확히 평가하지 않고 단순한 ‘초당적 대처’를 주문하는 것은 일종의 ‘물타기’가 될 수 있다. 보수언론이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은 야당과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들이 중국의 입장에 치우쳐있으며 심지어 ‘종북’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들의 반복되는 이런 주장은 외교안보정책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라기 보다는 야당과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들을 ‘못 믿을 사람들’로 묘사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는 걸로 보인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외교안보정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조속한 탄핵심판의 마무리와 조기 대선이다. 그것도 기다릴 수 없다면 국회라도 나서야 한다.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국회의 행보는 박근혜 정권의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명확한 평가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실패한 외교안보정책을 다시 답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수언론의 야당 의원들에 대한 비판은 이 점에 근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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