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대중음악페스티발이 여름에 번창했는가를 따져 묻기엔, 여름은 그저 너무 더울 뿐이다. 여름이라는 시간적 지표 위에 너른 광장이라고 하는 공간적 기표가 얻혀져, '음악'이란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다. 이번 주 말랑한 미디어의 주제는 젊음의 향연, 음악의 축제(확 촌스러워지는 이 수사의 촌스러움이란...) '락페스티발'이다.

모든 음악 페스티발의 현재적 원형질이라 할 만한 우드스탁페스티발이 40주년을 맞았다. 우드스탁이 뭐냐 묻는 당신이라면, 여름엔 그저 보양식만이 최고라고 믿으며 연신 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땀을 쏟는 아저씨일 듯도 싶고, 우드스탁에 무한한 환상을 갖고 있는 당신이라면, 아직은 더위보다 심장의 피가 더 뜨거운 청년일지도 모른다. 그 뜨겁던 여름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척박하다 못해 황폐하다고 일컬어지는 이 땅의 대중문화의 토양에서도 대중음악페스티발들은 태어났고, 성장해오고 있었다.DJ DOC와 쿨이 대중음악의 여름을 정확히 양분하여 지배하는 동안에도 더위를 식혀 줄 진짜 고수를 찾는 한 줄기의 갈망은 있었고, 함께 꾸는 꿈은 그럴싸한 현실이 되고 있었다. 우드스탁에서 제천국제영화제까지, 여름 그리고 대중음악페스티발의 역사와 가치 그리고 그 재미까지. 뜨거운 여름, 더위 조심하시고 즐감하시라. <편집자>

1969년의 8월의 우드스탁은 여전히 강력한 신화로 남아있다. 실상 1969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설사 태어났더라도 록 페스티발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제 막 산업화가 이뤄지기 시작한 변방의 개발독재국가의 국민으로 살았을 게 분명한 이 땅의 젊은이들도 얼마간 우드스탁이란 말에서 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어떤 경험이나 객관적 관찰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우드스탁에 대해서 상상한다. 젊음, 자유, 평화, 그리고 모든 이상주의적 가능성의 제전. 뜨거운 사랑과 뜨거운 음악의 한마당. 행복하게 음악을 즐기는 순수한 젊은이들. 수년전 우연히 만난 한 미국의 대학교수는 10대 후반 우드스탁을 직접 경험한 이였는데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해 여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후끈한(hot) 기억이다. 그 여름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살아있다.”

▲ 영화 우드스탁(Woodstock, 1970) 포스터, 마이클 와들레이가 연출했고 칼로스 산타나, 존 바우저 바우먼, 존 세바스티안, 스티븐 스틸스 등이 나오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정도면 록 페스티발에 대한 일방적 예찬을 늘어놓아도 부족함이 없을 듯 보이지만 따져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최근 일고 있는 록 페스티발의 지나친 상업화를 비판하기 앞서 대부분 당연하게 믿고 있는 우드스탁 신화에 대해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 해 여름, 태평양 너머 미국 맥스 야스거의 농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우드스탁이 있기 2년 전의 캘리포니아를 뒤덮었던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이라는 거대한 문화사적 흐름을 되짚을 필요가 있다. 히피즘이 절정을 달리던 1967년 히피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던 샌프란시스코는 사랑과 평화를 온 몸으로 주장하는 대책없는 이상주의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여겨지고 있었다.

기성사회 가치관을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무위자연적인 삶을 내세우는 이들에게 문화적 파트너로 등장한 것이 소위 서부 해안 지역의 사이키델릭 밴드들이었다. 기본적으로 LSD나 마리화나의 체험을 음악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골몰하는 이들의 음악은 현란한 의상과 조명 등에 의해 환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레이트풀데드나 제퍼슨에어플레인 등으로 대표되는 사이키델릭 음악과 히피즘의 결합의 극대화가 이뤄진 대표적 이벤트로 최초의 대형 록 페스티발이라고 할 수 있는 몬트레이 팝 페스티발이 바로 ‘사랑의 여름’이 절정으로 치닫던 1967년 6월 캘리포니아주 몬트레이에서 개최된다.

3일간 펼쳐진 몬트레이 페스티발은 실상 환각제의 남용으로 많은 후유증을 남긴 축제였으나 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팝 음악 시장에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이들이 60년대 후반 소위 미국 록의 '3J'라고 불렸던 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이다. 인기가 영국에 국한되어있던 지미 핸드릭스는 이 페스티발을 통해 미국 시장에서도 먹히는 뮤지션으로 발돋움했고 짐 모리슨이 이끄는 도어스의 'Light my fire'는 사실상 67년 최고의 히트곡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더 큰 성과는 사이키델릭 밴드들의 약진이었다. 백인 블루스의 여제 제니스 조플린을 간판으로 내세운 빅브라더&더홀딩컴퍼니를 비롯하여 컨트리조&더피쉬, 퀵실버메신저서비스와 같이 인기가 서부 해안의 히피커뮤니티에 국한되어 있던 샌프란시스코 사이키델릭 밴드들이 이 페스티발을 계기로 잠시나마 전국구 밴드로 반짝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몬트레이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레코드 제작자나 공연기획자들이 대형 록 페스티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약간 속되게 표현해서 공터에 시스템 깔고 밴드만 불러도 젊은이들이 우글거리고 참여한 뮤지션들의 음반이 대박나는 상황에서 잠자코 있을 업자들이 있겠는가. 60년대 후반 록 페스티발의 번성의 이면에는 사실상 ‘사랑과 평화’라는 이상주의에 기대서 눈에 한 밑천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계산기를 튕기는 기획자들의 결합이 있었다. 몬트레이에서 2년 후에 벌어진 우드스탁 페스티발은 그런 시대적 흐름의 한 가운데 있었다.

페스티발은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뉴욕 주 북부 베델 근처 맥스 야스거의 농장에서 벌어졌다. 명칭 그대로 뉴욕주 남동부에 위치한 우드스탁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현지 주민들의 반대로 개최지가 70km나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20대 중반에 불과했던 풋내기 기획자들인 존 로버츠와 조엘 로슨만은 당초 5만 정도를 예상하고 예매 18달러, 당일구입 24달러 표를 팔았는데 30만명에서 50만명으로 추정되는 대인파가 몰려들며 경계선과 출입구를 모두 부셔버려서 사실상의 무료공연이 되버렸다.

▲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 (Almost Famous, 2000) 포스터. 카메론 크로우 감독이 연출했고, 빌리 크루덥, 프란시스 맥도맨드, 패트릭 후지트, 케이트 허드슨 등이 출연했다.
우드스탁은 실상 당시 대부분의 페스티발이 그렇듯 공연 시스템이 형편없고 화장실이나 음식, 식수가 제대로 준비 안 된 그야말로 얄팍한 장사속으로 점철된 행사였다. 게다가 예기치 않은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공연장인 농장은 거대한 뻘밭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사상 최악의 공연이 될 수 있었던 이 난장을 구원한 것은 천진난만하고 대책없이 낙관적이었던 히피 청춘들이었다. 부족한 샤워 시설 대신 폭우로 인해 사방에 생긴 물웅덩이에서 물장구를 치며 젊음을 만끽했고 부족한 음식과 환각제(?)를 나누는 형제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반전과 사랑의 메시지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고 ‘우드스탁네이션’이라는 하나의 가상국가를 선포하며 이상주의의 승리를 선포했다.

게다가 우드스탁의 성공은 상업적 이윤으로도 이어졌는데 사실상의 무료공연으로 이어지며 행사 자체는 13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지만 개봉 5주 만에 2천 5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영화 <Woodstock>, 3장짜리 사운드트랙 앨범, 비디오 등으로 결과적으로 총 5천만 달러의 수익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아직 정상급이 아니었던 조 카커가 이 페스티발 출연 이후 대뜸 스타덤에 오르는 등 뮤지션 발굴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허나 우드스탁의 성공으로 절정을 이뤘던 록 페스티발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롤링 스톤스는 전미 투어를 마친 기념으로 히피문화의 중심이었던 샌프란시스코 남동부 알타몬트에서 무료공연을 열었다. 30만명이 몰린 이 공연에서 치안을 담당한 것은 폭주족 헬스 앤젤스(Hell's Angels)였는데 그들이 백인 아가씨와 있다는 이유로 한 흑인 청년을 살해했다.(충격적이지만 그 광경은 투어 필름에도 담겨있다.) 게다가 LSD 과용으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했고 LSD에 취한 여성이 집단강간 당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이것은 결코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히피즘과 사이키델릭 문화의 약물 남용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흑백 문제 등 잠복된 갈등 요소가 적지 않았다. 실상 우드스탁에서도 사상자가 있었지만 축제의 성공에 힘입어 묻혀버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타몬트 사건은 언론을 탔고 가뜩이나 당시 청년문화를 철딱서니 없는, 집 나간 젊은 놈들의 광대놀음 정도로 여겼던 기성세대의 집단 포화를 맞아야 했다. 그렇게 ‘사랑의 여름’은 급격히 냉각되어 버렸다.

‘사랑의 여름’이 막을 내린 1970년대 초반의 록 문화를 그린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에 나오는 인상적 대사가 있다. 공교롭게도 1969년 샌디에고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1974년 고속도로 위에서 끝나는데 실제 크림지 편집장을 지낸 전설적인 록 칼럼리스트 레스터 뱅스(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주인공에게 지금(1970년대 초반)이 “록 음악이 연예산업으로 편입해 들어가는 매우 위험한 시기”라고 역설한다. ‘사랑의 여름’이 끝나자 곧장 매니지먼트와 계약서의 시대가 열렸고 많은 밴드들은 시대에 뒤쳐져 사라졌고 극히 일부는 거만한 억만장자 록스타가 되었다. 실상 록 페스티발에서 대중들과 록커들이 한덩이로 뭉쳐서 즐겼던 ‘사랑의 여름’에도 이런 좌절의 요소들은 어느 정도 잠복해 있었다. 우드스탁의 철없는 장사속은 그 철없음 덕분에 오히려 이상주의 제전으로 구원될 수 있었지만 기획자들은 점점 더 노련하고 계산적으로 변해갔고 더 이상의 반전은 없었다.

실은 이런 서구 청년문화의 흐름에서 한참 비켜나 있던 우리들은 우드스탁이나 ‘사랑의 여름’을 잘 알지 못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이면이 있듯 우리에게 그것을 전해준 서구 록 저널리즘의 현란한 입심에 일백프로 동의하기 미심쩍은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록 평론가 사이먼 프리스가 지적하듯 록이 일종의 향수 산업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만난 그것들은 “옛날 옛적의” 신화로만 소비될 뿐이다. 한국에서도 1970년대 초 벌어졌던 청평 페스티발 같은 것들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그 기억의 유전자는 극히 소수에만 남겨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록 페스티발과 뜨거운 여름의 열기에 대한 판타지가 이성의 영역 저편에서 가슴을 울리는 것은 오랜 서구 문화의 학습효과일까. 아니면 이상주의적 해방구에 대한 막연하지만 끝없는 갈망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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